조금 천천히 가면 생명이 보입니다

시속 60km를 ‘사선’으로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동물들이 있다.

섬진강 맑은 물을 따라 달릴 때, 지리산 울창한 숲속 드라이브를 즐길 때 속도계를 눈여겨 봐야 할 이유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드킬(Road-Kill)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이다.

▲ 차에 치여 희생된 하늘다람쥐. 연구원들은 “야생동물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필 줄 아는 운전자들의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라고 말한다.
야생동물의 도로상의 교통사고, 그로 인한 사상을 일컫는 용어인 로드킬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최근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고, 그 엄청난 피해규모가 알려지면서 경각심이 커진 탓이다.

시속 60km는 사고회피 한계속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속도를 넘어서면 도로에서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운전자는 멈출 수 없고, 야생동물들은 피할 수 없다는 외국의 연구사례가 있다.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는 최근 지난해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8개월간 실시한 로드킬 실태조사 1차 보고서를 내놓았다. 환경부 차세대핵심기술개발사업의 과제로 진행중인 이 프로젝트는 2007년까지 계속된다.

서울대가 조사구간으로 설정한 곳은 지리산권 순환도로 320km 중 1/3에 해당하는 123km. 이 현장에서 매일 실태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이들이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연구원 최태영(31)·최천권(52)·최동기(54)씨다. 천권씨의 작업장인 구례읍 봉동리 ‘뿌리공예사’가 이들의 본거지다.

태영씨는 서울대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아예 구례로 내려와 본격적인 실태조사에 뛰어 들었다. 오랫동안 지리산생태보존회 활동을 해온 천권씨와 동기씨는 지난해부터 서울대 프로젝트에 동참해 오고 있다.

▲ 삵
이들이 지리산권 도로들을 발로 누비면서 파악한 로드킬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1년 동안 100km 구간서 3000마리 정도가 죽습니다.” 그나마 이 규모는 형태가 남아 있는 사체만을 수거해 집계한 것이어서 ‘최소한’이라는 것이 태영씨의 설명이다.

“개구리·잠자리 등 작은 개체들은 바퀴에 묻어 갑니다. 흔적조차 남지 않아요.” 전국의 도로연장이 10만km 정도이니 단순하게 계산하면 로드킬 피해 동물은 이에 1000은 곱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자꾸만 넓어지고 빨라지는 도로가 야생동물에겐 사지가 되고 있음이다.

“우리나라 도로밀도는 1㎢당 1㎞가 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의 행동반경이 1㎢를 넘죠. 삵 같은 경우는 10㎢에 이르고요.”

지리산권 도로 100km서 연간 3000마리 희생

태영씨는 결국 동물들의 삶의 영역에서 도로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삶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어쩔 수 없이 넘나들어야 하는 것이 야생동물들의 숙명이 돼 버린 것.

▲ 고라니
하지만 도로엔 동물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야생동물이 건너야 할 도로는 넓고, 차는 너무 빠르다. 차량 속도와 야생동물의 수난은 비례한다. 근거도 있다.

지리산 남쪽 19번 강변도로와 북쪽 88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로드킬 규모가 확연한 대조를 이룬 것. “둘 다 2차로거든요. 하지만 19번로 제한속도는 시속 60km고 88고속도는 80km입니다.” 천권씨는 모니터링 결과 너구리·삵 등 대부분의 야생동물의 수난은 88고속도에 집중돼 있었다고 말했다.

대신 강변도로에선 두꺼비가 주된 희생자였다.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구를 물리쳐 섬진강의 전설로 남은 두꺼비들이 현대문명의 이기 앞에 힘없이 스러져 가고 있는 것. 걸음이 느리고 떼지어 활동하는 특성상 도로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곧 죽음에 직면하는데, 지난 1년 동안 섬진강변에서는 1000여 마리가 희생되는 참화를 겪었다.

야생동물의 엄청난 희생은 운전자의 상식과는 다른 이들의 생태습성도 크게 작용한다. 너구리·삵·고라니 등 포유류의 대부분은 밤에 희생당했다. 차량의 조명이 너무 밝아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기 때문이다.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버려요. 안보이니까. 차가 속도를 못줄이면 그대로 사고나는 거예요.” 동기씨는 “어두운 곳을 찾는 이들이 불빛과 도로사이 좁은 암흑지대를 찾아 차로 달려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쓸데없는 도로 안만들기·생태이동통로 절실

부엉이·조롱이 등 조류는 낮이 위험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지만 차와 부딪치는 상황은 흔한 일이다. “로드킬 당해 죽어 있는 조류들은 먹기 위해 내려오거나, 먹고 난 뒤 날아 오르다 차와 부딪치는 경우가 많죠.” “새들의 비행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고 운전자들에게 경각심을 촉구하는 태영씨.

지금과 같은 수확철엔 특히 더 희생이 많다. 터전으로 삼았던 논밭의 작물들이 베어지면서 이동이 잦아지는 계절적 요인을 아는지라 연구원들이 바짝 긴장하는 시기다.

“길가에 족제비 어미가 쓰러져 있더라구요. 그 곁에 새끼 두 마리가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데…. 같이 죽겠더군요. 붙잡아서 야생으로 돌려보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죠.” 매일 아침 순찰 돌 때마다 피흘린 생명들을 거둬야 하는 연구원들. “세상에 이런 못할 짓이 없지”를 되뇌다 보면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절박감에 이르게 된다.

“쓸데없는 도로를 안 만드는 것이 우선.” 연구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다음이 생태이동통로를 제대로 만드는 것. 하지만 여기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과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는 희망이 교차한다.

“2차로에 생태통로 한곳 설치하는 데 20억원이 듭니다.” 엄청난 비용은 절망이다.

“요즘 새로 뚫린 길들은 도로 아래로 수로와 농로들이 많아요. 최근 뚫린 4차로 산업도로를 보니, 6km 구간에 왕래 가능한 공간이 35개나 되더라구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동물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설계 당시부터 조금만 배려를 하면 훌륭한 생태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태영씨의 기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운전자들의 마음가짐. 시골길, 숲속길을 달릴 땐 계기판을 살펴볼 일이다. 속도를 낮추면 뭇 생명들이 보이고,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희생된 하늘다람쥐. 연구원들은 “야생동물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필 줄 아는 운전자들의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라고 말한다.

/채정희 기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