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미질도 숨어서…주인 문 앞만 얼씬 거려도 가슴 덜컹

수천 년을 이어온 보릿고개를 몰아내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힘찬 구호가 전국에 메아리치면서 온 산천이 긴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렸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살길은 수출밖에 없다. 바다를 메우고 산을 깎아냈다. 그 자리에는 거대한 공장이 들어섰다.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등장했다. 한마디로 몇 달 사이에 강산이 변해 버렸다.

   
이처럼 70년대 들어서면서 공업한국을 건설하기 위한 거센 파도는 거침이 없었다. 가발이나 고무신·옷을 만들어 수출해 가지고는 어느 세월엡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 이제는 중화학 공업이다. 쇠를 다듬는 공장을 세우고 돌려야 한다. 그 우렁찬 깃발은 우리의 산업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었던 시절. 그 힘찬 기계소리는 모두의 희망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한번 잘살아 보겠다는 큰 꿈을 안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촌은 떠나는 사람들로 매일 줄을 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농촌은 텅텅 비어 갔다. 모자라던 논밭은 남아돌았다. 어느새 산골짜기 천수답은 잡초가 무성해 졌다.

거센 공업화의 바람은 공업학교도 터져 나갔다. 매년 수천 명이 들이 밀어 아무나 쉽게 들어 갈 수도 없었다. 공업학교에 다니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3년 동안 밤낮으로 쇠를 깎고 다듬고 납땜을 배웠다. 그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공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세계의 반열위에 올려놓은 주역이었다.

셋방살이 인생 눈물로 시작하고 방세밀려 매일 고민만 가득한데

공장 따라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부동산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집값은 껑충 뛰어 아무나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사람은 많고 집은 적다 보니 방세는 끝없이 치솟아 올랐다. 한달 벌어 거의 반이 집세로 나갔다. 그러니 서민들의 생활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지 않고는 하루도 살수가 없었다. 반면에 집 가진 사람들은 정해진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방세가 꼬박 꼬박 들어 왔기 때문에 돈 세는 재미에 싱글벙글 했다. 그 재미에 급속한 공업화만큼이나 인심도 빠르게 고약해져 갔다.

집주인들은 돈 욕심에 콧구멍만한 틈만 있어도 방을 넣었다. 집집마다 셋방이 나래미집처럼 늘어서 마당도 없었다. 지붕도 비만 겨우 새지 않도록 덮었다. 봉창도 없어 환기가 잘 안돼 여름에는 습기가 차 눅눅하고 쾨쾨한 곰팡이 피는 냄새가 났다. 그래도 비는 방이 없었다. 한 집에 셋방이 대여섯 개는 보통이었고 열개가 넘는 집도 수두룩했다. 매달 받는 방세만도 월급쟁이 몇 달치 봉급을 넘는 집이 많았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지만 간혹 가다가 별난 집 주인을 만나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방세 날짜에 하루만 늦어도 “이 집에 들어 올 사람 많다”며 당장 방을 비켜 달라고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아이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시끄럽다고 달려왔다. 전깃불을 오래 켜 놓았다. 빨래를 자주 한다. 사람이 너무 많이 들락거린다. 심지어는 얼굴 씻고 머리 감는 것 까지, 화장실 가는 것도 간섭을 해댔다.

셋방을 사는 사람들은 주인만 문 앞에 얼씬 거려도 또 무슨 잘못을 했는가 싶어 가슴이 덜컹 거렸다. 한마디로 주인 주눅이 들어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젖먹이 아기가 울어도 얼른 보듬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손님이 와도 주인이 먼저 쳐다보였다. 다리미질도 주인이 집을 비우기를 기다리다가 문 밖을 나서면 후닥닥 해치웠다. 내 돈 주고 살면서도 매일 매일 주인 눈치를 살피는 것이 일이었다. 한마디로 집 없는 서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서러움 탓인지 모두 빨리 돈벌어 내 집을 하나 갖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유독 중장년층들이 내 집 마련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살림살이 점점 어렵게 변해가니 이슬맺힌 눈가 더더욱 아려오네

한마디로 전기료가 많이 나와도 물세가 많이 나와도 모두 셋방 사는 사람 탓이었다. 자신은 쓰는 것이 별로 없는데 왜 이렇게 전기료와 물세가 많이 나왔느냐며 몇 날 며칠이고 마당 한 복판에 서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앞방을 잡고는 건넌방을 뒷방에 가서는 옆방이 전기를 많이 쓴다고 몰아세웠다. 하룻밤 자고 나면 모두 전기료와 물세를 많이 나오게 한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셋방살이 10여년에 주인 잔소리를 한 두 번 들은 것도 아니고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이력이 붙어 너 혼자 떠들어 대다가 입 아프면 말겠지 하며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등 하나 켰는데 무슨 전기료가 이렇게 많으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 같지만 그러다가 괘씸 죄에 걸려 몇 달 안가서 이삿짐 보따리를 싸기 십상이었다. 그 놈의 이삿짐 보따리 이제는 진절머리 난다. 셋방 구하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집 주인의 비위를 맞추며 눌러 앉아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서상순(63)씨는 셋방살이 이야기만 들어도 뼈아픈 옛날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며 말도 못 꺼내도록 한다. 맨주먹 하나만 쥐고 도시로 나와 돈을 열심히 벌었지만 내 집을 마련 하기는 쉽지 않았다. 1000원을 모으면 집값은 몇 배로 뛰어 올랐다. 객지 생활 10여년 만에 이사를 다닌 것만 셀 수도 없다. 심할 때에는 일년에 두 번 집을 옮기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삿짐을 싸는 것도 지긋 지긋 했다.

한번은 살고 있는 집이 갑자기 팔리는 바람에 급하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아놓은 돈도 없어 전세방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몇날 며칠을 돌아도 월세로 여섯 식구가 들어갈 만 한 방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모두다 아이들이 많아 집이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집을 사 이사를 올 사람은 방을 비워 달라고 난리인데 내 들어 갈 집은 없어 가슴이 바짝 바짝 탔다. 하루 종일 방을 구하려 발이 불어 터지도록 돌았지만 모두 식구가 많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방을 주기로 하고 말이 잘 되어 가다가도 식구 이야기만 하면 두말도 듣지 않고 다른데 가서 구해 보라며 돌아서버렸다. 어느 집을 가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너무 너무 난감했다. 그렇다고 집을 살 형편은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늘도 허탕만 쳤다. 방을 비워 주기로 한 날은 지났고 거품을 물고 들들 볶아대는 집 주인이 눈에 선했다. 이 집 저 집을 돌아 나오니 발걸음은 무거워 천근만근 같았다. 그날따라 자신이 그렇게 초라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없는 것이 서러워 졌다. 골목 모퉁이에서 그냥 쪼그리고 않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많고 많은 것이 집인데 왜 내 들어 갈 곳은 없나…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것을 뭣 하려 많이 나아가지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입에서 한숨과 탄식이 함께 터져 나왔다. 자식 많이 낳은 것도 죄인가? 더러운 세상이라고 울분을 토해 보지만 담 벽이 막고 섰다.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니 집주인은 방을 비워 주지 않는다고 살림살이를 모두 밖으로 들어내 놓았다. 자식새끼들은 쫓겨 나와 밖에서 울고 섰고 마당에 나뒹구는 가재도구를 바라보니 너무나 비참했다. 하룻밤만 자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해도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악이 받치니 입은 거칠어졌다. “집도 절도 없는 놈에게 이 밤중에 어디를 가란말이냐” “네놈은 자식 안 키우나”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끌어 부었다.

그래봤자 집주인은 코방귀만 날렸다. 땅바닥에서 자든 다리 밑에서 자든 내 집에서만 나가만 주면된다. 앓던 이를 뽑아내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문을 꽝 닫아 버렸다.

내야 비를 맞고 자도 괜찮은데 저 자식새끼들은 무슨 죄가 있어 이슬을 맞혀 재워야 하나… 오갈 데가 없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만 깜박거리는 새끼들을 바라보니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세사는 사람이 세사는 사람의 심정을 알았는지 옆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젊은 부부가 한사코 자기 방으로 오라고 당겨 밤이슬을 맞는 것은 면했다고 한다. 방이 비좁아 아이들만 재우고 그 젊은 부부도 그냥 앉아서 날을 새웠다고 한다.

그 대식구로는 방을 얻을 수 없어 날이 밝자 마자 자식새끼 두 놈은 외갓집으로 보내고 네 식구라고 집 주인을 속여 간신히 방을 얻었다고 한다. 셋방 살다가 쫓겨난 그 심정은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며 밥은 굶어도 내 집 없이는 하루도 못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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