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일본’ 다시 들여다 볼 때

한일협정 외교문서가 공개됐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보니, 참 일본은 ‘영원한 숙제’라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이번 여름에 동경에 들를 일이 있었습니다. 신주쿠 역사를 지나다 구내 서점에 들어갔더니, <대동아전쟁의 진실>이라는 책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었지만,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돼 있었습니다. 속으로 “흠!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이런 책이 출판되는구나”하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귀국후 인터넷에서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의 손녀가 ‘내 조부는 전범 아닌 훌륭한 사무라이’라고 주장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도조 히데키라니!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한많은 사연을 탄생시킨 장본인중 한명이 아닙니까? 일본에서 본 책을 떠올리면서, 광복 60주년인 올해 2차대전 전범들이 다시 각광을 받게되는 건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봅니다.

근현대 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인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기 평가받는 바가 다릅니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라고 하는게 정확합니다.

초대 통감으로서 식민통치의 기틀을 다진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조선의 공적(公敵)’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안중근 의사는 목숨을 걸고 그를 저격했던 것입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그를 ‘일본 근대사를 수놓은 위대한 정치갗로 바라봅니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했을 때 전 일본은 그를 기리는 추도장으로 변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봉천회전(奉天會戰)의 주역이었던 노기 마레스케는 “이토공의 장렬한 죽음이 너무 부럽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메이지 일왕이 죽었을 때 그 뒤를 따라 할복자살한 ‘사무라이의 전형’으로 잘 알려진 군인입니다.

국내에서 이토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비슷한 유형의 인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습니다. 한국인들과 직접 맞닥뜨리진 못했으나, 이 사람은 막부를 무너뜨린 이후 줄기차게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수십년전에 이미 조선을 쳐야 한다고 주장한 ‘침략원조’인 셈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마뜩찮은 이 사람도 일본에서는 우상 수준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도조 히데키의 손녀로서는 자신의 조부를‘일왕에게 지순한 충성을 바친, 전범 아닌 훌륭한 사무라이’라고 주장할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조 유코라는 이 손녀는 그런 한편 히데키를 성웅시하는 근거로 ‘위대한 천황폐하론’을 덧붙입니다. 천황에게는 태평양 전쟁에 대한 책임이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황폐하는 무엇보다 평화를 원하셨다. 폐하는 특별한 존재다. 그분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본의 황실은 영국 왕실과는 다르다. 폐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많은 일본인들은 ‘폐하, 만수무강하소서!’라며 죽어갔지 ‘도조 장군님 만세’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들 260만 명의 위패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이유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섬뜩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심각한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연 유코가 말하는 일왕은 특별한 존재이며,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일까요?

<근대 일본>이라는 책자로 유명한 사학자 이안 부루마는 일왕숭배를 메이지 시대에 진화된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메이지 시대에 진화된 천황 숭배는 야마가타의 징집군대만큼이나 현대적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결코 최고의 신으로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 말기까지 그는 교토에 살면서, 문화를 육성해왔고 일본 관습과 정신을 지키는 영적 보호자일 뿐이었다.”

에릭 홉스봄이 <창조된 전통>에서 갈파했듯이, 근대에 급조된 이미지가 마치 수천 수만년을 지탱해온 위대한 전통인 것처럼 착각한 채 일왕절대론을 주장하는 것이 가소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근거해 조부를 ‘순혈 사무라이’로 주장하는 것 또한 유치하기 짝없는 행위가 아닐까요?

어쨌든 또다시 일본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를 보면서 ‘내 안의 일본’을 다시 자문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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