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독일의 ‘국가공안문서관리청’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치권에서 독일의 슈타지 청산이 자주 언급되고 있고, 한국형 ‘문서공개관리위원회’가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①과거불법에 대한 민·형사 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특별법 제정, ②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과 명예회복, ③연말에 출범할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담고 있다.

1989년 11월초. 구동독 전지역에서 동독민주화혁명은 가속화되었다. 에어푸르트(Erfurt), 드레스덴(Dresden), 라이프치히(Leipzig)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국가공안부(구동독 국가정보기관, 슈타지) 건물을 점령했다.

이들은 국가공안부의 완전 해체를 주장했다. 시민들은 수집된 자료를 없애려는 국가공안부의 시도를 봉쇄했고, 자료의 보존에 역량을 결집했다. 1990년 1월 중순 베를린 소재 국가공안부중앙본부건물이 시민들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국가공안부는 독일통일(1990.10.3)까지 15개 행정구역에 각 1개 본부, 211개 지방행정구역에 각 1개 지부, 그 외 7개 특별관리구역에 각 1개 지부를 설치하고, 동독의 모든 지역에서 정칟경제·문화·교육·체육 등 전분야를 감시해 왔다.

국가공안부의 공식요원은 중앙본부 2만명, 지역 9만명, 약 15만명의 비공식요원이 활동했다. 국가공안부의 감시 및 정보수집활동은 동독공산당 최고지도층을 제외하고 전방위로 이루어졌다. 국가공안부가 혁명과정에서 미처 파기하지 못했던 사찰문서만 178킬로미터, 약 600만명에 대한 보고서였다.

베를린 장벽(1989.11.9)이 무너지고, 국가공안부는 이듬해 1990년 3월 31일 전격 해체되었다. 당시 혁명주도세력은 시민위원회였다. 이들은 가장 먼저 국가공안부에 의하여 수집된 자료 보전에 총력을 다했다. 그 목적은 정치적 전환기에서 이 자료에 담긴 정보를 이용하여 과거의 국가공안부 관련자들이 또 다시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각 지역에서는 시민위원회가 국가공안부문서를 지키고 있었고, 국가공안부 중앙본부(베를린)의 자료는 시민위원회와 원탁회의 안전위원회, 국가공안부해체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공동으로 관리했다.

문제는 “누가 이 ‘문서상자’를 열 것인가"였다. 동독의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990년 3월 구동독 정권을 대표할 마지막 자유총선거가 동독에서 실시되었다. 새롭게 구성된 동독인민의회는 ‘국가공안부자료 관련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에 요하임 가욱(Joachim Gauck) 인민의회의원을 임명했다.

그 해 8월 동독인민의회는 ①국가공안부 활동의 정치적·역사적·법적 청산, ②국가공안부에 의하여 수집된 자료의 오용방지, ③자료이용 및 관련자의 자료열람권보장을 위하여 ‘구국가공안부의 개인관련자료의 이용과 보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동독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동독주민들의 요구로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되었다. 서독정부도 국가공안부 문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가욱목사를 ‘국가공안자료관리특별전담관’으로 임명하여 계속 자료를 관리하게 하였다.

두 달 후 1990년 12월 2일 독일에서 최초로 전독일 연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새롭게 독일연방의회가 구성되었다. 동독인민의회에서 의결되었던 위 법률안을 기초로 2년 동안 논의 끝에 1991년 12월 29일 연방의회는 ‘국가공안부문서관리법’ 제정·발효하고, 국가공안부문서 관리를 위한 ‘국가공안문서관리청’을 신설하였다. 독일연방대통령 산하 직속기관으로 두고, 당시 바이체커 연방대통령이 특별전담관이었던 가욱목사를 초대 국가공안부문서관리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992년 1월 2일부터 임무를 시작하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과거청산의 역사적 운명’, ‘해독을 제거하는 역사적 조캄라는 주장과 “과거문제에 대해 이쯤해서 종결하자”는 반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독일 ‘국가공안문서관리청’ 주요업무는 6가지로 요약된다. ①국가공안부자료의 열람·공개·사본교부, ②피해자 복권 및 보상의 지원, ③공공기관 종사자 및 종사희망자들에 대한 인적 심사, ④국가공안부의 조직, 수법과 활동방법의 조사·연구, ⑤구동독 체제범죄 형사소추의 지원, ⑥국가공안부 문서의 보존·정리·보고였다. 연방의회는 여야 합의하에 후속조치로 ‘구동독정권범죄 공소시효정지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가욱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공안부 작성 개인 관련 문서는 마치 개인일기장을 보는 것 같다”. 동독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국가공안부의 활동과 관련이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이 너무 엄청나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확산되었다. ‘판도라 상자’였다. 개인 사생활 침해를 고려하고, 무고한 제3자의 피해가 없도록 ‘국가공안문서법’은 보호규정을 엄격하게 마련하였다. ‘국가공안문서관리청’은 두 번의 활동기간을 연장하여 8년간 활동하다가 1999년 12월 31일자로 임무를 끝냈다.

독일의 논의과정은 물론 한국의 논의과정과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 60주년 경축사가 국립묘지를 참배한 북한대표단에게 전하는 선문답(禪問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국정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언론보도가 나온다. “檢, 국정원 압수·수색 착수(8월 19일)”. 독일 이야기를 현명하게 분석하길 바란다.

/하태영(경남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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