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벗고 맨발로 다닌 적이 많았던 때

금은 흔하고 흔한 것이 운동화지만 30여 년 전에만 해도 아무나 신지 못하는 아주 귀하고 귀한 신발이었다. 당시에는 운동화를 베신 또는 베구두라고 불렀으며 웬만한 부잣집 아이들도 설날과 팔월 명절에나 한 번 얻어 신을까 말까 하는 그야말로 귀한 물건이었다.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사 신기 어려운 시절이라 아이들에게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렵게 한 켤레 장만 하면 보물단지보다도 더 꼭 꼭 감추어 놓고 소풍날이나 학교 체육대회가 있는 특별한 날만 내 신었다. 학교에 신고 가서도 잃어 버릴까봐 골마루에 있는 신발장에는 놔두지 못하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수업시간에도 공부는 뒷전이고 책상 밑에 넣어둔 운동화만 꼭 쥐고 있었다. 흙탕물이 한 방울만 튀어도 바로 우물가로 달려가 씻어냈다. 물을 건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흙길은 운동화를 벗어 들고 맨발로 걸었다. 한마디로 운동화를 보물단지처럼 모셨다.

이처럼 귀한 운동화가 우리나라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21년 일본으로부터다. 1880년 이후 양복과 함께 서구식 구두가 들어오면서 신분의 상징이었던 우리의 신발 문화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처음에는 외교관들과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구두와 베구두를 신었다. 고종도 구두를 신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0년대를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구두가 들어 왔지만 상류층인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과 가끔 신여성들이 버선에 구두를 신고 다녔을 정도였다. 1920년대 들어서야 구두가 유행을 했지만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서민들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신분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구두 한 켤레 가격이 쌀 세 가마와 맞먹을 정도였다. 200평 논 한마지기를 일년 내내 농사 지어도 구두 한 켤레를 살 수가 없는 거금이었다. 그래서 구두는 특정한 계층에 한정되었다.

그 무렵 눈을 뜬 사업가들이 값싸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 한마디로 대중화를 만들려고 온 정열을 기울였다. 피나는 노력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것이 바닥만 고무로 되고 윗부분은 천막용 베로 덮은 신발이었다. 벗고 신는데도 편리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에 맞게 매우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정도로 대단한 유행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편리화, 경제화, 또는 경편화라고 불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고 있는 우리나라 운동화의 첫발로 보는 시각이 많다. 또한 이 경제화는 한국형 고무신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아이디어가 되었다고 한다.

리나라에 고무신 공장은 1919년에 한말 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세운 대륙고무주식회사가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대장군 표’로 첫 번째 생산한 고무신은 왕실에 진상되어 순종이 처음으로 신었다고 한다.

대륙고무가 고무신을 출시함에 있어 순종께서 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여 여관(女官)각위의 애용을 수하야… 라는 내용으로 1922년 9월 21일자 신문에 광고까지 실었다. 고무신 공장은 우리나라 산업의 촉망 받는 한 축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1921년 중앙상공주식회사(김성수)가 세워졌고 평양에는 정창고무공장이 설립됐다. 1932년에는 만월표 고무신 공장이 전주에 세워졌다. 가격은 한 켤레에 대략 40전 이쪽저쪽이었다. 이때부터 대도시에는 고무신이 보편화 되면서 일반 서민들의 신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이후 생필품 부족현상은 물가 폭등을 가져와 서민들의 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그 와중에 6·25가 터지면서 귀한 물자가 더 귀해 고무신과 운동화는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서민들의 집에는 다시 짚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고무신 공장은 쉽게 취직을 할 수 없었다. 여성들도 글깨나 읽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고무신 공장에 다니는 여성들은 신여성으로 통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별한 공장이 없었던 터라 신발 공장에 다닌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부심이 대단했고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1등 신부 감으로 통했다. 웬만한 남성들이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는 퇴짜 맞기 일쑤였다. 도시 여성들은 신발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고무공장 큰 아기’라는 노래까지 불리어 졌다고 한다. 그 노랫말은 이렇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 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감독 앞에 해죽 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 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나….

어렵게 한켤레 장만하면 신지도 못하고 애지중지

운동화가 처음 시장에 첫선을 보이자 사람들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발에 신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저렇게 좋은 물건을 발에 신다니…. 짚신이 최고인줄만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놀라움에 뒤로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 신기한 물건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돈이 없어 사 신을 팔자는 못되지만 한번 구경이나 해 보겠다고 장안의 사람들이 신발가게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진풍경을 연출 했다. 열흘 밤낮으로 짚신을 삼아 한 짐 지고 나온 짚신 장수는 속에 천불이 올랐다. 쥐뿔도 없는 놈도 너도 나도 베신 하는 바람에 완전히 파리만 날렸다. 짚신 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봤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막걸리 한 사발에 취기가 오른 건달들은 “그 밥그릇도 종쳤다” “통 까막눈이갚 “미련하면 발이 고생이라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렇게 폼 나는 운동화는 처음은 아무나 신을 수 없었다. 돈 많은 부자들이나 신고 거들먹거리던 신분 과시용이었다. 그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만 봐도 하늘나라에서 온 이방인처럼 아이들이 신기해 뒤를 쫄쫄 따라 다녔다. 운동화 한 켤레 값이 쌀 한 가마에 버금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 베신을 신고 싶은 욕망은 꿀떡 같았다.

그래서 대부분 서울의 지체 높은 고관들이나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들을 덮쳐 베신을 빼앗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베신을 신었다고 내가 내내 하며 헛기침을 하며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가는 기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맨발이 되어 버렸다.

한 두 명이 짝을 지어 골목이나 건물 뒤에 숨어 있다가 순식간에 뛰어나와 넘어뜨린 후 신발만 벗겨 달아났다. 서울 가서 베신 신고 깝죽거리지 말라, 다리몽둥이 부러지는 것은 고사하고 코 베인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신어보기를 원했던 운동화는 처음에는 그 용도도 뛰기에 알맞은 경기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신고 활동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한마디로 고무신의 단점을 보완해 만든 것이었다.

고무신 열풍 잠재운 ‘베신’ 나왔을땐 열광의 도가니

특히 달리기를 할 때 신고 뛰어도 빠르게 달릴 수 있고 발을 보호하는 데 더 없이 좋았다. 그 편리성이 인정되면서 사람들은 운동회 때나 경기를 할 때 주로 신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체육시간에 신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자연스럽게 운동할 때 신는 신발이라 하여 운동화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다고 한다.

당시 짚신을 주로 신었던 일반 서민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어보고는 너무 너무 편리하고 신기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무신을 신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할일 없이 동네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왼발을 한번 쳐다보고 오른 발을 한번 쳐다보고 온 동네 자랑을 했다. 그 고무신의 행복감은 나랏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운동화를 신어보고는 가볍고 사뿐해 날아 갈 것 같아 공주 마마의 유리 구두가 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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