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생각]교육운동,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영원한 민족사 앞에 그 책임의 일단을 회피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 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 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1986년 5월 10일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가 주체가 되어 발표한 5. 10 민주화선언이다.

교육을 '인간공동체의 평화로운 삶을 추구함과 아울러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며 생명으로서의 품위를 갖춘, 마음과 몸의 균형이 잡혀있는 총체적 인간을 키워내는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1989년 출범한 단체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다.

전교조 홈페이지.
전교조가 출범당시 우리교육이 더 이상 피폐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정권의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깃발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 10민주화선언이 있고 수십년, 전교조가 탄생한 지 20년이 가까와 오는 지금 이 땅의 교육현실은 그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고 참교육이 실현되고 있는가? 당시와 달라졌거나 가까운 장래에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사람이라도 있을까?

‘시험을 못 쳐서 미안합니다. 엄마 아빠 죄송해요.’ 지난달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명문고 3학년생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2005년 올 한해 2월부터 4월까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학생이 언론에 보도된 것만으로도 20건이 넘는다. 1등이 아니어서, 성적이 상위 1% 집단에 속하지 못해서 자살을 택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고 일등이 되기 위해서는 친구의 공책을 찢어버렸다는 아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친구가 한 문제라도 더 풀지 못해야 자신이 살아남는 참혹한 현실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 공책은 안 빌려 주는 것은 물론, 일부러 틀린 답을 가르쳐 주기까지 한다는 것이 우리 교실의 기막힌 풍경이다. 4년 전에 비해 사교육비가 30%나 급증하고 가계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47%나 된다고 있다. 자녀 1인당 월평균 교육비 지출액이 가구당 28만7000원이나 된다는 보도다.

교육뿐이 아니다. 2000년 8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58.4%인 758만명에 이르고 GDP대비 사회보장비 지출이 OECD 30개국 중 29위, 아직도 노동 유연화 1위라는 부끄러운 오명을 받고 있다. 여기다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고 사용자의 불법파견을 고발하면 고발한 노동자가 구속되는 게 우리의 노동 현실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정권을 거치면서 수많은 노동자가 구속되고 죽어갔다. 그러나 국민소득 1만불시대라면서 심각한 빈부격차문제는 좋아져 보일 조짐이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진보적인 인사의 헌신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가? 

괘도수정! 그렇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걸 확인한 이상,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교육운동의 경우를 보자. 10만 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과 교총, 그리고 한교조라는 교원단체에다 이름만 적대관계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학부모단체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자는 초기와 비교가 안 된다. 숫자만이 아니라 탄압국면도 아니다. 빨갱이 집단이라고 매도 당하던 전교조가 정부와 교섭까지 벌이는 기적(?) 같은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달라진 게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김용택 교사.
1. 일의 본질을 잘 못 짚고 있다. 주요모순이니 근본모순이니 하는 거창한 이론이란 집어 치우자. 일이란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 할 일이 있다. 근본적인 일이 있고 지엽적인 일도 있다.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앞 뒤 분별없이 일을 하다 보면 오히려 일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는다.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학벌에 있고 학벌문제로 인해 일류대학문제가 나타나고 공교육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교육위기란 일류대학 입학을 놓고 경쟁에 매몰되다보니 교육과정을 무시한 공교육의 위기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학교가 학교구실을 못하는 이유다. 수많은 엘리트집단이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는 침묵하는 사회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비판이 용인되지 않는 죽은 학교가 된 이유는 학교장 승진제의 모순 때문이다. 학교장에게 절대권을 주고 바늘구멍만한 승진의 기회를 주면 희소가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으로 교사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학교는 학교장 중심의 전근대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학벌과 학교장 승진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교육개혁도 기만이요, 허구다. 교사의 자질이며 학생의 인권이며 모든 교육 모순의 핵심이 여기에 있음에도 전교조는 과연 근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는가? 최근 수년간 각 시도단위에서 교육청과 협상한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시간 조합원의 숫자 늘리기 사업과 교직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에 관한 일에 몰두해 왔다. 근무시간문제며 방학 중 당번문제며 그 지리한 지엽적인 문제로 진을 빼고 정작 본질적인 문제에 많은 힘과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둘째, 조합원의 자질향상을 위한 교육사업을 외면했다. 개인은 물론 단체란 그 구성원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10만 조합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가입원서도 없이 의무이행에 동의하는 동의서 한 장도 없이 조합비만 내면 조합원 이 되는 노동조합으로 그  험난한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복직교사들이 모이면 농담 삼아 그런 얘기들을 한다. “해직 당시 1500명과 현재 10만 조합원 중 정부가 어떤 조직을 더 두려워할까?” 당연히 해직교사들이다. 이념으로 무장되고 조직의 결정에 따르는 자세 없이 ‘회비 내는 조합원 의 수’로 과시하려는 조직을 두려워 할 사용자는 없다. 단결된 힘, 이념으로 무장된 일당 백의 조합원이 목숨을 걸고 싸운 다는 것. 그것은 곧 조합의 힘이요, 승리의 원천이다.

3. 노동조합의 과두화가 문제다. 현재 합법화된 노동조합이 대부분 그렇듯이 노동조합 지도부는 하나의 권력이다. 더구나 10만 조합원이라는 그리고 조합비를 원천징수하는 그 돈의 힘 앞에 조직을 이끌어 가는 지도부는 하나의 권력이 된 지 오래다. 모든 권력이 다 나쁜 게 아니다. 관료화된 조직에 비판마저 없다는 이러한 조직은 위험한 조직이 아닐 수 없다. 학교가 그렇지 않은가? 교장의 독선이 싫어 전교조에 참여했다는 조합원조차 자기들끼리 내편을 만들고 ‘자기 사람 키우기’ ‘내 사람 심기’ ‘챙기기’는 과연 없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위원장 지부장 지회장 선거를 할 때면 그런 속성이 드러난다. 학연, 지연 혈연까지 동원하는 제도권에서 하던 못된 방식을 빼닮았다. 비판을 비난으로 착각하고 거대한 패거리 문화를 만드는 조직이라면 일의 핵심이 보일 리 없다.

전교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사는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을 반복하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 게임이라고 할까? 말도 안 되는 미끼를 던져놓고 그 문제로 조합원들이 사업방향을 놓고 NL방식이니 PD방식이니 하면 사업방향을 잡지 못할 때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주는 당근을 받아 그것을 사업 성과로 착각하곤 한다. 군사정권이나 독재권력이 하던 짓이다.

최근 정부며 재벌이 하는 짓이 그렇다. 신자유주의다 교육개방이다 던져두고 다가 올 폭풍에 대비해 자료를 찾고 사업방향을 정하고 하는 글자 한 두자로 밤을 세우는 동안 사주 측에서는 노동탄압을 위한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타협이라는 당근을 내놓고....

'천천히 하자 급할 것 없다' 이제 노조에서도 이런 얘길 자주 듣는다. 아니 그런 분위기다. 기득권세력(?)이 된 노조라면 급할 게 없다. 사주로부터 대우받을 만큼 받는다. 사실 조합원에 대한 예우며 임금이나 작업환경조건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급하게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입시부담으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아이들 목숨을 지키자고 시작한 일 아닌가? 이념이 무엇이고 교육이란 다 무엇인가? 사람살자고 한 일 아닌가? 그런데 그 아이들의 절규가 한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노조는 방관자가 될 수 있는가?

패배는 역사의 오점이다. 과두제, 관료화, 헤게모니 다툼, 조합원의 의식 고양... 이많은 과제를 두고 머떤 사업이 우선 사업인지조차 찾지 못한다면, 여기다 인간에 대한 애정까지 식어가고 있다면 노조는 자기부정이다. 기둑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세상에서는 노조는 또 다른 사용자가 아닌가? 이런 현실을 두고 노동해방, 교육해방은 가능키나 한 일일까?

참, 한가지 잊은 게 있다. 홍세화선생님이 빠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나는 고국에 돌아가 내 자녀를 전교조 선생님에게 맡겨 교육시키고 싶다'는 소원이 아직도 유효한 지 만나면 꼭 한 번 물어봐야겠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