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의 원흉이 이기붕(李起鵬)·최인규(崔仁圭)라면 경남일원, 특히 마산·창원일대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게 한 장본인을 말한다면 바로 이용범(李龍範·57)일 것이다.

당시, 자유당 도당위원장이라는 막강한 위치에서 위세당당하게 살아온 그의 자택을 ‘오동동 경무대’라 불릴만치 어마어마한 세도를 부렸던 곳이다.

그는 제1공화국의 지배층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친일파적 속성, 이승만을 무조건 섬기는 광신주의적 속성, 매판적 자본성을 두루 보여주는데 가장 돋보인 인간형이었다.

일찍이 이용범은 경주 이씨인 아버지 이윤언(李允彦)과 어머니 정인숙(鄭仁淑)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1907년(실제는 1903년생임) 김해군 진영면 좌곤리 25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이범이(李範伊)였는데 1936년 이용범으로 개명해버렸다. 어머니가 개가하는 바람에 의붓아버지 윤혁진(尹赫振) 밑에서 취학도 하지 못한 채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이다.

청소년 때부터 토건업에 뛰어들어 공사판의 생리를 터득하고 뼈가 굵어진 이용범은 1946년 6월 마산시 신포동에다 ‘대동공업사’를 설립, 토건업을 자영해왔다.

이용범은 자수성가형의 재산가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의 행위는 오로지 친일상공업·독점 청부업·이권 납품업이라는 반민족경제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그야말로 정·경밀착의 토대 위에서 치부만을 계속 일삼아왔던 것이다.

특히 살벌하기 이를데없는 6·25전쟁 당시 겁도 없이 부산시 명장(明藏) 정수장 확장공사에 뛰어들어 재미를 톡톡히 본 것이다. 그 다음 적기에 주둔해 있는 미군부대 막사건설을 도맡아 떼돈을 벌이는 등 천부적 사업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화폐가치가 없을 때라 은행에서 트럭으로 운반하여 돈을 찾아 썼을 정도였으니 그 난리통에도 두둑한 뱃심으로 얼마나 치부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용범은 이때 번 돈으로 정계를 진출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55년 12월 서울에다 ‘극동연료주식회사’를 차렸다. 전국에서 생산규모가 가장 큰 석탄공장이자 교통부 기관차용 가공탄 공급업체로 떵떵거리며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금권으로 이승만 집권을 가능케하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행동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릴만치 개인적 신임이 매우 두터웠던 것이다.

1954년 제4대 민의원선거에 창원을구에서 일약 당선, 경남전역을 손아귀에 틀어쥐며 ‘이용범 왕국’이라는 세력권을 형성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의 수하에는 김병국을 비롯해 서득룡 검찰지청장·손석래 경찰서장·서복태 세무서장·강상봉 사찰·조광수 보안·송평조 수사계장에 이르기까지 이용범의 조종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심복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39명 경남출신 의원을 거느릴 만큼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러다보니 금권정치의 보스답게 하루 10만환 이상의 거금을 뿌리고 다녔다. 이때, 오동동 이용범의 자택은 권력의 심장부가 되어 뭇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이용범의 재처 하말수(河末守·55)는 남편을 능가하는 탁월한 로비와 정치력을 발휘한 여걸이었다. 그네는 남편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십분활용, ‘오동동 경무대’라는 세칭을 더욱 실감케한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자택에는 경무대와 이기붕 집에 바로 통화할 수 있는 경비전화까지 가설해 놓았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3월 15일, 이용범은 마산·창원에서 이승만·이기붕의 높은 지지율을 창출해내기 위한 충성바치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했다.

그의 지시로 투표소시설에 비밀투표를 할 수 없게 만들어 장막 뒤에 감시케하는 기상천외의 짓거리까지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 비자유당계의 투표지는 찢어버리고 선관위원들이 다른 투표지에 찍어 투입하도록 닦달을 해 대기도 하였다.

이토록 이용범은 역설적으로 말해 시민들로 하여금 의거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가는데 기여한 최대의 공로자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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