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3) 이주택지로 간 원주민들 4

이웃·가족 흩어버린 이주, 과정도 다난
편법과 권세 얽히며 관계 망가지기도
"화목한 인심 잃은 아쉬움에 눈물 나"

'웅남면 제1' 완암리 주민 매해 모여
크게 세운 유적비 앞에서 고향 기억
"갈수록 옅어져 가는 관심 안타까워"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한 우물 먹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 "마을 사람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냈지. 시집온 사람이 동네 우물가에 물 길으러 가면 '누구 며느리고?' 살갑게 묻고, 빨래도 같이 하러 가고. 동네 아이들은 장복산 절골, 숯골 쏘다니며 토끼 사냥을 했지. 추석이면 아낙들, 누나들이 동네 큰 나무에서 그네 타고…. 학교에 가면 완암 사는 애들은 노루하고 뛰어논다고 괜히 놀리기도 하고.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창원시 완암리 출신 손정식(76) 씨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완암리는 지금의 효성중공업 창원공장 터에 있었던 120여 가구 규모의 마을이었다. '제1 완암, 제2 가음정'이라 불릴 만큼, 웅남면에서 살기 좋은 마을로 꼽혔다. 손 씨는 이곳 구장(이장) 집 7남매 중 차남이었다. 통지문 심부름할 때마다 구장 아들 왔다고 반겨주던 마을 어른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해병대 신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뒤에는 농사를 지었다. 1970년대 중반 완암지구 조성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마을은 평화로웠다.

지난 22일 마산회원구 내서읍 자택에서 만난 완암리 출신 손정식(76) 씨가 원주민들이 이주단지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고 있다. /강찬구 기자
지난 22일 마산회원구 내서읍 자택에서 만난 완암리 출신 손정식(76) 씨가 원주민들이 이주단지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고 있다. /강찬구 기자

손 씨네 가족은 집과 논밭을 수용당한 대신, 이주택지에 1필지를 받았다. 그렇게 넘어간 땅 중엔 손 씨가 베트남 파병 기간 매달 송금한 30달러를 아끼고 아껴 산 논도 있었다. 원주민들이 대개 그랬듯, 택지는 받았지만 집 지을 돈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손 씨 가족은 당시 한일합섬에서 근무했던 장남이 모은 돈, 차남의 월남전 파병 보수 등이 있어 겨우 집을 지었다. 하지만, 받은 택지에 덩그러니 움막만 짓고 살거나, 땅을 포기하고 사업을 벌이다 보상금을 모두 잃은 사람도 있었다. 손 씨 얘기다.

"또래 친구 십여 명도 창원 이주단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수원으로, 부산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지. 집도 없고, 생업도 없어지니 객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

타향으로 떠난 손 씨 친구들은 완암리가 밀린 뒤에도 한동안 창원을 찾았다. 아직 차가 많이 다니지 않던 시절 겨울이면 도롯가에 차 세워놓고 눈싸움을 하기도 했고, 용동못(지금의 신리 물향기공원)에서 밤새 노래 부르며 놀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매년 열었던 완암유적비 제례. 올해 10월 3년만에 다시 열릴 예정이다. /완암향우회
코로나19 이전에는 매년 열었던 완암유적비 제례. 올해 10월 3년만에 다시 열릴 예정이다. /완암향우회

◇보상 문제로 가족·이웃 소원해지기도 = 모든 재산과 미래 기대 수익을 새집과 맞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원주민들은 절박했다. 어차피 제값을 못 받고 수용당할 거라면 눈속임을 써서라도 택지를 더 받겠다는 사람도 생겨났다. 마당을 중심으로 위채·아래채로 나뉜 집터를 돌담으로 갈라 두 가구로 평가받는 식이었다. 자연마을 주소 정리가 확실히 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렇게 주장해도 진실을 가리기 어려웠다. 마을 이장이 감정사들에게 보증해주면 그대로 인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잘만 하면, 약 60평쯤 되는 이주택지를 한 곳 더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화목했던 이웃 간 불화가 싹트기도 했다. "택지 하나 더 받자고 마당에 담을 쌓아 놓았는데 당시 이장이 '이 집은 원래 나뉜 집이 아니라 밤새 담을 쌓아놓은 집이다'라고 이야기해서 수포로 돌아간 일이 있었지." 

손 씨 부친이 전임 이장이었던 만큼 당시 이장 집안과도 친분이 두터웠지만 사이가 멀어진 계기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함께 복무했던 선임이 여동생과 결혼해 마을에 왔을 때, 이장 동생과 싸움이 벌어진 탓이다. 이때 품은 앙심 때문인지 알 길은 없지만, 손 씨 가족은 몇몇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필지를 인정받지 못했다. 

손 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화목하게 살던 동네였고 나름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왔었는데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안타깝고, 한때 양심을 속인 일도 평생 부끄러워." 

보상·이주 과정에서 처지가 달라진 주체가 단순히 가구와 가구 사이만은 아니었다. 한 집에 8남매까지도 흔했던 당시, 집 한 채로 귀결된 재산은 당연스레 장남이 상속하곤 했다. 손 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이전에 매년 열렸던 제례에서 완암유적비 앞에 차려진 제상. /완암향우회
코로나19 이전에 매년 열렸던 제례에서 완암유적비 앞에 차려진 제상. /완암향우회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주택지 새집은 어머니 이름으로 했고, 어머니는 장남에게 집을 물려주겠다는 뜻이 확고했지. 집을 올리는 데 나도 일조했다고 생각했는데 한때는 크게 섭섭하기도 했어. 내 친구 후배도 그렇지만, 다른 집들은 보상 문제로 형제간 법적 분쟁까지 갔던 경우도 많았고." 

최소한의 생업 기반을 창원에 만들지 못한 그 시대의 동생들 중 일부는 그렇게 창원을 떠났다. 손 씨는 다행히도 우연히 익힌 석재 기술을 바탕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이주택지에 새집을 짓던 사람들이 마감이며 기둥, 계단 등을 돌로 꾸미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손 씨는 지금 창원시 의창구 윤병원 자리에 있던 '마산석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며 웃었다.

◇옛터 유적비에서 추억 더듬어 = '완암은 장복산의 높은 기상이 등내골을 타고 내려와 둥지를 튼 곳이었습니다. 흰 구름을 안고 있는 높은 산의 그윽한 바위들과 암반을 흘러내린 덕천곡의 맑은 물이 동네 복판을 지나며 깨끗하고 근면 성실한 인간의 품성을 길러준 마을이었습니다. …… 여기에 공단이 들어섰습니다. 실향민이 된 우리들은 선조들의 깨끗한 자취와 소먹이며 멱감고 물고기 잡으며 놀던 향토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오늘 여기 모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이 석각이 고향을 잇는 완암인들의 마음의 이정표이기를 바랍니다.' <완암유적비문>

창원 이주단지에 남은 완암 사람들은 아직도 매년 10월이면 만나서 고향을 추억한다. 최근 3년 동안은 코로나19 여파로 모이지 못했지만, 다들 올해 모임을 기다리고 있다. 만남의 장소는 완암소류지 인근에 조성한 '완암 유적비' 앞이다. 현재 창원에는 원주민 마을 옛터마다 비석이 서 있는데, 완암유적비는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왼쪽에는 비문이, 오른쪽에는 완암사람들 명단이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다. 원래는 완암사거리 옛 마을 터 가까이 세웠지만, 도로 부설 관계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완암향우회가 2012년 완암유적비 제례에서 읊었던 축문./완암향우회
완암향우회가 2012년 완암유적비 제례에서 읊었던 축문./완암향우회

손정식 씨 친구이자 전 완암향우회장인 박용운(75) 씨는 이렇게 말했다. "완암 출신 이병호 대웅산업개발 대표가 비석 설립 경비를 댔어. 향우회를 시작한 지는 20년 정도 됐는데, 매년 제를 지내고 축문을 읊은 뒤 완암 사람들끼리 축제처럼 시간을 보내."

2~3년 차이씩 한 기수로 묶어 한 번 모이면 고향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벌초하러 온 완암 사람들이 비석 명단에서 반가운 이름을 보고, 고향을 지켜줘 고맙다며 향우회로 연락해오거나 찬조금을 보태기도 한다. 

박 씨 얘기다. "봉림동 이주단지는 40여 개 원주민 자연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향우회도 연덕·창곡·월림 등 다 따로 조직돼 있어. 마을 규모가 작았어도 완암처럼 아직까지 활발하게 모이는 곳이 있고, 동네가 컸어도 단합이 잘 안되는 곳이 있지. 아이들도 향우회에 가입시키고 다른 마을 사람 자녀들과 같이 명절에 공도 차고 했는데, 직접 겪은 추억이 없다 보니 나이를 먹으면서 관심이 옅어져 안타깝기도 해…."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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