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2) 이주 택지로 간 원주민들 3

긴 조성기간만큼 나뉜 조건에
원주민도 이주 방식 선택 갈려
농토 찾아 개별로 이사 간 곳
또 다시 수용 대상에 이주 당해

곳곳 철거로 공터와 공가 많아져
위험 도사린 '우범지대' 되기도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이주 택지에 집을 마련하기에도 모자라는 보상비, 불충분하게 갖춰진 주거 환경·기반시설 등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이유로 창원시에서 추진된 이주는 원주민들에게 여러 어려움을 안겼다. 이주는 또한 첫 삽을 뜬 1970년대 중반부터, 길게 보면 마지막 철거지인 가음정동 주민들이 이주를 마친 2010년 전후까지 30년 넘는 세월에 걸쳐 벌어진 일이다. 때문에 이주도 수용과 보상처럼 그 시기와 상황에 따라 원주민들에게 천차만별의 기억을 남기고 있다.

◇자리 잡을 만하니 다시 나가라 = 시기를 달리해서 수용 대상이 된 자연마을 원주민들 가운데는 정부가 정한 이주 택지로 가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주의 조건인 택지 분양비와 건축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축이다. 다른 이유로 이주택지로 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덕정동 출신인 이종은(54) 경남공익재단 상임이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절대다수가 농업이 밥줄이던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생계 수단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상받은 돈으로 아직 수용되지 않고 농토에 면한 곳에 땅을 사 개별적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두 번 이상 수용과 이주를 겪기도 했지요." 

이 상임이사의 '동네 형'인 손상희(56) 씨의 경우가 그랬다. 손 씨 가족의 집은 덕정동에서 처음 수용을 겪고, 이사 간 월림동에서 다시 수용돼 사림동 택지로 이주했다. 손 씨 얘기다. 

"원래 살던 곳이 덕정 지금 현대로템 자리인데, 거기가 수용되면서 받은 보상비로는 그때 이주택지로 정해진 대원동에 집 짓기가 마땅찮았어요. 평당 수십 원 받았다고도 하데요. 나중에 결국 포기하고 직장을 잡아 가셨지만, 아버지는 처음에 농사 계속 지으시겠노라고 그리로 구태여 가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간 곳이 월림동이었는데, 거기서 살다가 다시 수용돼서 사림동으로 갔지요. 물론 그때는 보상이 나쁘지 않아서 분양받은 택지에 집을 올려서 이사했습니다."

당시 도시 설계를 맡은 대지종합기술공사의 직원이었던 윤재필(72) 시인은 측량하러 갔던 곳에서 본 일을 회상했다. 

"당시 중앙동 1번지, 지금 이마트 창원점 옆에 있는 곳이에요. 지도를 보면 주변 다른 곳이 전부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이 돼 있는데, 거기만 대각선으로 건물이 서 있어요. 어딘지 정확하진 않은데, 거기 사람들은 이미 이주를 와서 정착한 상태였죠. 그런데 그때 또 시에서 나가라 하는 상황이 된 거라. 측량하려고 찾아가니 똥바가지를 들고나오고 난리가 났어요. 이제 자기네들은 보상도 뭐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데모를 하다 보니 결국 추진이 안 돼서 거기만 구획이 다르게 남아 있는 걸로 알아요."

1992년 3월의 사파동 이주택지 모습.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가 듬성듬성 남아 있다. 가운데 보이는 흰색 건물은 창원지방검찰청과 창원지방법원이다. /양해광 창원향토사자료전시관 관장
1992년 3월의 사파동 이주택지 모습.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가 듬성듬성 남아 있다. 가운데 보이는 흰색 건물은 창원지방검찰청과 창원지방법원이다. /양해광 창원향토사자료전시관 관장

◇풀 내음 시골 마을 위험 깃든 어두운 공가로 = 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 비고, 빈집이 늘면서 이주 예정 철거지역은 치안·행정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도희주(56) 작가는 곧 철거될 사파정동에서 평생 잊기 힘든 일들을 겪었다. 도 작가의 가족도 연덕동 자연마을에 살다 수용돼 대원동으로 이주했고, 가족 사정으로 현재 사파동 일부인 사파정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이주 대상이 됐다. 사파정은 당시 상남면에서 큰 마을에 속했고, 김해 김씨·밀양 박씨·해주 오씨·진양 강씨 등의 집성촌이 있던 곳이었다. <창원출장소사>를 보면, 사파정은 1983년 일부 전답이 먼저 수용되고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마을의 수용과 보상, 철거가 진행됐다. 주민들은 사파정에 조성된 '사파이주택지 조성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1987년, 사파정 이주의 끝물이다. 사람들이 원 마을에서 대부분 나가고 빈 가옥들만 덩그러니 놓인 시기, 도 작가는 자신이 겪은 두 가지 일을 털어놨다. 드문 인적과 숨기 좋은 빈 가옥들은 비어가는 마을을 '우범지역'으로 만들었다. 1987년 겨울 무렵 사파정동 도 작가 집 주변은 본인이 '전봇대섬'이란 수필에서 묘사한 대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데 이어 가옥마저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주변이 휑해진 이유로 집에 외풍이 심해져 아버지가 문 앞을 군용 담요로 막아둔 방 안에서, 도 작가는 어느 날 겪은 일을 기억한다. 

"문밖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어요.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고 뭔가 은밀한 동작으로 방문을 조금씩 열려고 하는 거 같았어요. 발끝으로 문 열리는 것을 막고 담요를 걷으며 '누구야!' 하고 소리쳤더니 달아나는 발소리가 들렸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아버지는 대문, 부엌문,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철거 마을에 찾아든 것은 도둑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불 꺼진 골목길의 불청객은 도 작가에게 충격적인 외상(트라우마)마저 안겼다. 온 나라가 서울올림픽을 맞아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1988년, 사파정동은 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건물이 사라진 곳에 길은 뚫려 가는데 마을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는 종잡을 수 없었다. 빈집에는 부랑자들이 들락거렸고, 술 마시고 고함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집 처자가 밤길에 당했다더라"는 식의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다.

하지만 당시 새내기 직장인이었던 도 작가는 소문과 소란을 귓등으로 넘기며 일상을 이어가야 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반복하던 3월 어느 날에 흉흉한 풍문은 현실로 다가오고 만다. 도 작가는 당시를 털어놨다. 

"사파정동은 그때 버스 종점이었어요. 버스서 내려 아스콘 포장도로와 가로등이 있는 길을 지나면 150m 정도 깜깜한 길이 나와 평소에도 무서웠죠. 그날 자줏빛 투피스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가는데, 유난히 사위가 어두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본 길 한쪽에 트럭 두 대가 서 있는 사이로 담뱃불이 보이더군요. 핸드백을 다잡으며 잔뜩 긴장해 지나며 오르막길을 오르는 순간 누군가 목덜미를 낚아챘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물이 마른 도랑에 처박히듯 눕혀져 있었고 괴한의 무게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죠. 다행히 악을 쓰며 지른 비명을 듣고 나온 근방에 있던 한 아저씨가 그 자를 낚아채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가 아버지와 함께 괴한과 그 친구를 잡아 경찰에게 넘길 수 있었죠. 하지만 몸이 받은 충격으로 걸을 수가 없어 열흘을 입원해야 했지요.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병원을 나오고부터 사람이 무서워졌던 거예요. 한동안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단둘이 있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였지요."
/강찬구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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