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경남 가야유적을 찾아서 (22) 남해 도마리패총

가야는 경남과 부산을 넘어 경북, 전북 등지에도 세가 있었다. <삼국유사>는 가야 영역이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서 지리산까지라고 기록하지만, 낙동강 동쪽 지역과 섬진강 서쪽 지역에서도 가야의 고고학적 기록이 확인된다. 동래·양산·창녕 등지와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지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서 독립된 역사를 누린 가야는 남해안 바닷길을 이용해 성장했다. 선진지역과 교류하며 몸집을 키웠다. 통일 왕국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멸망 직전까지 가야는 통일국가 형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가야가 나뉘어 불리게 된 배경이다.

삼한시대 변한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남해에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 13개 정치집단이 변한에 있었는데, 이 중에서 위치 비정이 가능한 곳은 구야국(김해), 안야국(함안), 고자미동국(고성), 미리미동국(밀양), 독로국(거제 또는 동래) 등 11개국이다. 남해에도 정치집단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문자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이 터를 틀고 살았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변한 정치집단들이 바닷길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성장했던 걸 고려하면, 남해지역 정치체 역시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컸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연구가 없다시피 해 실체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몇 없는 유적을 대상으로 군이 학술조사를 벌인 적은 한 차례도 없다.

남해에는 문헌 자료뿐 아니라 고고학적 자료도 부족하다. 가야유적이 20개소 정도에 불과하다. 눈에 띄는 봉토분은 확인되지 않는다. 함안이나 김해, 창녕에 있는 고분군처럼 군집을 이루는 가야시대 무덤 유적은 지역에 남아 있지 않다.

패총 유적은 하나 있다. 남해 고현면 도마리 서도마마을에 있는 도마리패총이다. 패총은 수렵, 어로, 채집을 통해 삶을 살아온 옛 사람들이 조개 등의 패류(貝類)를 먹고 버린 껍데기와 생활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지는 유적으로, 흔히 조개더미라고도 불린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문화유산이다.

1980년대 남해 도마리패총 전경. 마을주민들이 패총 위에 밭을 일궈놓은 모습. /동아대박물관
남해 도마리패총 위치. /남해군

도마리패총은 서도마 마을회관 뒤편 삼봉산(422.5m) 산줄기와 이어진 고도 50m 안팎 얕은 야산에 분포한다.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군은 7800㎡에 이르는 패총이 도마리 일대에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추정대로라면 지정문화재인 김해 회현리패총(9만 295㎡)과 창원 성산패총(5만 4230㎡), 내동패총(1만 7904㎡)보다는 작은 규모다.

도마리패총 존재가 처음 학계에 전해진 건 1968년이다. 한국 고고학계 아버지로 불리는 고 김원용(1922~1993) 교수가 단행본 <남해도서고고학>을 발간하면서 알려졌다. 남해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패총으로, 조성 시기는 2~4세기로 추정된다.

1987년 동아대박물관이 진행한 가야문화권 유적정밀조사 보고서를 보면, 30여 년 전 이 유적에서는 전기 가야시대 토기편 등이 다수 확인됐다. 회청색경질토기편, 우각형파수편, 무문토기편이 수습됐다. 성문타날토기, 격자문타날토기, 노형토기편, 고배 파편, 가락바퀴(방추차) 등도 발견됐다.

남해 도마리패총 채집유물. /남해군
남해 도마리패총 채집유물. /남해군
남해 도마리패총 채집유물. /남해군

학계에서는 도마리패총이 남해의 가야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도마리패총은 단순한 패총이 아니라 성곽”이라며 “토성 흔적을 가진 유적이다. 실제로 가보면 여느 허름한 패총과는 다르게 성처럼 다듬고 조정된 흔적이 도마리패총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정 교수는 “토성에 살던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버리면서 패총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패각이 드러나서 패총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 일대는 방어를 의식해 만들어진 중요한 취락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원후 2~4세기 남해안에서 맹위를 떨쳤던 포상팔국(가야 8개 소국) 중 한 세력이 남해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뒤, “바다에 근거를 둔 강력한 해상세력에 의해 도마리패총이 만들어진 거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제교역항의 면모를 가진 유적이라는 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대 남해 도마리패총 전경. 마을주민들이 패총 위에 밭을 일궈놓은 모습. /동아대박물관
1980년대 남해 도마리패총 주변 전경. /동아대박물관
1980년대 남해 도마리패총 전경. 마을주민들이 패총 위에 밭을 일궈놓은 모습. /동아대박물관

지난 5일 오후 2시께 찾은 도마리패총 일대는 마을주민들이 밭을 일궈놓은 상태였다. 패총 위에 고추와 콩, 해바라기 등이 심겨 있었다. 태양광 시설도 밭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밭에서는 깨진 토기편이 눈에 띄었다. 패총 앞으로는 바다가 드러나 보였다. 유적과 해안선 간 거리는 500m 정도였다. 이는 1960년대 초 간척사업 이후 해안선이 후퇴한 결과로, 이전에는 간척 전 해안선이 불과 150m 거리에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마을주민들은 자신의 선조 때부터 쭉 유적 일대가 밭으로 사용돼왔다고 밝혔다. 이날 만난 유근만(74) 서도마마을 이장은 “패총이 있는 곳에서는 동도마, 서도마, 중도마마을 사람 10여 명 정도가 농사를 짓고 있다”며 “이미 오래전부터 밭으로 쓰여오던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나이가 많아서 문화재라는 걸 모르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패총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밝힌 한 주민(65)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토기편이나 조개껍데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경작하는 땅을 파서 문화재 조사를 할 거라면, 행정이 땅을 사서 진행하는 게 맞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나를 포함한 다른 주민들이 다 반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대박물관은 앞선 조사 보고서에서 패총 훼손이 심한 상태는 아니지만, 계속 방치될 시 훼손이 우려된다고 적었다. 박물관은 “밭으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패각의 훼손이 있은 듯한데 인근 주민 말에 의하면 개간 시 수종의 토기편이 다량 출토됐다”며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발굴조사를 해서 그 성격을 규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며, 아울러 훼손방지책이 요망된다”라고 썼다.

정 교수는 삼국시대 남해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유적이자, 남해군의 역사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적이라며 발굴조사가 선행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전임 정부가 가야사 사업을 벌일 때 남해군은 이 유적을 조사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했어야 됐다”며 “남해군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인데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고성 동외동패총과 비교해 성격, 시기, 규모, 입지까지 거의 모든 게 똑같다”고 했다.

그는 “김해패총과 거의 유사한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유적이기도 한 만큼, 군이 특별관리를 해야 한다”면서 “발굴조사를 하게 되면 분명 큰 성과가 있을 거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뒤 추후에는 문화재(사적) 지정 절차도 밟아 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남해군은 지표조사를 먼저 진행할 계획이다. 신강호 군 학예연구사는 “주민 동의를 받아 9~10월 사이 지표조사를 진행을 할 수 있도록 해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석환 기자 cs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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