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더하기 (7) 남해+다랭이마을

다랑논에선 여름 열기 덜해
물 머금어 땅 무너지지 않게
재래·친환경 농법 가치 간직

남해의 길은 요란하지 않다. 거칠게 툭 썰어 낸 칼국수 면발처럼, 대개 해안선이나 등고선을 따라 좁다랗고 가늘게 이어진다. 누구든 발길을 재촉할 재간이 없다. 1024번 지방도를 따라 남면 홍현리 다랭이마을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 볕이 쨍쨍, 날을 잘 잡았다며 살짝 내달리려던 차에 갑작스레 맞닥뜨린 운무 탓에 계속 우렁이 걸음이다.

◇다랑논 = 운무를 헤치고 닿은 바닷가 마을, 벼랑 끝 너른 바다에 먼저 눈이 간다. 그마저도 잠시, 등선과 바다 사이에서 '어서 오시다' 인사 건네는 초록빛 계단에 곧장 눈길을 뺏긴다.

▲ 남해 다랑논. 초록빛도 여러 결이다. /최환석 기자
▲ 남해 다랑논. 초록빛도 여러 결이다. /최환석 기자

다랑논은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 비탈에 둔 계단식 논이다. 비탈에 석축을 먼저 두고 땅을 골라 끌어온 물을 채운다. 습기가 많은 축축한 땅, 엄연한 습지다. 비탈에 있는 까닭에 덩치가 큰 농기계는 들이지 못해 지금도 흔히 재래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쌀을 얼마나 내는지 물어볼 것도 없이, 기복 없는 너른 논보다는 모자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요즘은 관광지 인상이 더 짙은데 혹시라도 논 자체 가치가 얕보일까 걱정이다.

다랑논은 빗물을 머금어 넘치지 않게 균형을 잡고, 물 흐름을 느슨하게 해 땅이 깎이는 것도 그치게 한다. 마침 도랑에서는 빗물이 콸콸 쏟아져 바다로 흐르는데, 다랑논 쪽은 잠잠하다. 비탈을 오르내린 터라 땀이 비 오듯 쏟아지다가도, 다랑논 속살 사이를 걸으면 신기하게도 열기가 덜하다. 물을 머금은 다랑논은 여름철 더위도 한풀 꺾는다. 비탈 아무 데서나 다랑논이 자아내는 경관은 아주 으뜸이다. 이 즈음 다랑논은 초록도 여러 결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느라 층층이 다른 빛깔을 낸다.

논은 농사를 지어야 제 몫을 한다. 손을 멈추면 서서히 말라 거북이 등 무늬처럼 쩍쩍 갈라진다. 틈으로 물이 들면 혹여 땅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경관을 즐기는 것조차 오롯이 농사짓는 이 수고로움 덕이다.

◇암수바위·우렁이·밥무덤 = 비탈 한 데 바위 한 쌍, 암수바위다. 화강암인 바위는 미륵불로 불린다. 하나는 암미륵, 나머지는 수미륵이다. 암미륵은 만삭 여인에, 수미륵은 남성 생식기에 빗댄다. 모양새가 그럴듯하다.

▲ 암수바위. /최환석 기자
▲ 암수바위. /최환석 기자

음력 10월 23일에는 마을 무사태평과 풍농풍어를 비는 제를 지낸다. 어부가 처음 잡은 고기를 바위에 바치면 고기도 많이 잡고 사고도 막는다고 믿는다. 풍요와 다산의 민간 성기 신앙이 불교와 만나 미륵으로 변모한 셈인데, 성 숭배 신앙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드러내는 자료로도 쓰인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재다.

다랑논 사이로 난 길이나 논두렁에 거뭇한 점이 빼곡하다. 돌이 박혔나 살폈더니 죄다 우렁이다. 보통 흙을 잘게 부수어 고르는 써레질을 마친 바로 다음이거나, 모내기를 마친 다음 사흘 안에 새끼 우렁이를 논에 푼다. 우렁이는 잡초를 뜯어 먹어 농사를 돕는다. 자칫 밟을까 봐 우렁이처럼 슬렁거리며 걷는다.

▲ 우렁이. /최환석 기자
▲ 우렁이. /최환석 기자

논을 벗어난 민가 골목, 불쑥 삼 층으로 쌓은 탑 같은 것이 나타난다. 밥무덤은 모든 마을 사람이 마을을 지키는 동신에게 올리는 제사 '동제'와 관계가 있다. 동제를 지내고 나면 제사에 올린 밥은 구덩이에 묻는다. 밥무덤의 다른 이름은 밥구덩이다. 다랭이마을 밥무덤은 마을 중앙에 탑처럼 쌓은 것 하나와 마을 동서쪽 돌담 벽에 하나씩, 모두 세 개다.

▲ 밥무덤. /최환석 기자
▲ 밥무덤. /최환석 기자

밥무덤은 구덩이, 황토, 묻는 밥, 덮개돌로 이뤄진다. 마을마다 구덩이 크기는 다른데, 반드시 도끼로 판다. 밥은 제물이라, 밭을 갈거나 거름을 퍼 나르는 삽이나 괭이는 쓰지 않는다.

동제는 여러 지역에서 지내지만 밥무덤 제사를 지내거나 밥을 묻는 제의는 경남지역, 특히 남해안 지역에 쏠린다. 논이 적어 귀하디귀한 쌀, 그 애착이 신앙으로 이어진 것. 다랑논에서 억척스러움이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랭이마을 = 가천마을은 지난해 다랭이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랭이마을은 다랑논 경관뿐만 아니라 어디서 내려다봐도 탁 트인 전경이 일품이다. 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다랭이마을은 아주 알맞은 장소다. 펜션 단지인 근처 빛담촌을 거쳐 항촌~사촌~유구~평산 바닷가를 걷는 남해 바래길 11구간 다랭이 지겟길 시작점이라서다. 반대로 원천항에서 시작하는 바래길 10구간 앵강다숲길 종착점이기도 한데, 홍현마을에서 다랭이마을 바닷가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구간 경관이 으뜸이라고.

다랭이마을은 남해군 첫 농촌체험 휴양마을이라 이것저것 즐길 거리가 많다. 마침 마을 소개도 인상 깊다. 뜨는 해를 가슴에 품고 소원을 빌고 싶거나, 나물을 캐고 싶거나, 손 모내기를 해보고 싶거나, 개울 돌을 뒤져 참게를 잡고 갯바위에서 감성돔을 잡고 싶으면 사계절 언제든 반긴단다.

달빛을 받으며 마을 해설사인 김효용 이장과 마을 곳곳을 걷는 '달빛 걷기'도 있는데, 마침 올해도 오는 10월까지 치른단다. 남은 일정은 이달 6일, 20일, 내달 3일, 10월 1일. 뭐든 궁금하면 다랭이마을 두레방에 들러 물어보거나, 마을 누리집(darangyi.modoo.at)을 참고하자.

농로를 가로막는 주차는 금물이다. '요기 주차허모 다랭이 할배들이 골낸'다는 알림이 정겹다. 마을 안은 길도 좁고 차 댈 데도 마땅찮으니 멀찍이 두고 걷기를 권한다.

/최환석 기자 che@idomin.com

※이 기사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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