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예술이다 (21) 한예란 피아니스트

중학교 때 시작한 피아노
"어느 날 눈물만 하염없이"
끝없는 연습에 마음 지쳐
잠시 공장·공연 기획 일도

"결국,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네요."

잠시 멀리하니 다시 가까운 순간이 온다.

한예란(31)은 음대를 졸업하고 창원의 한 방산업체 문을 두드렸다. 짧았지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귀한 눈빛을 기억한다. 서로를 보듬으며 일하는 이들을 보고 경쟁에 몰두한 혼자가 아닌 여럿이 어울려 피아노를 치겠다고 마음먹었다. 2016년 창원·김해에서 활동하는 피아노 전공자들을 모아 '클랑피아노앙상블'을 만들었다. 오는 9일 창원문화재단 진해문화센터 공연장에서 10회 정기연주회를 앞둔 연주자 한예란을 지난 1일 만났다.

▲ 한예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다. /한예란
▲ 한예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다. /한예란

◇피아노에서 도망쳤던 순간 =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라고요. 하루 10시간씩 매일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제가 싫었어요. 그날부터 피아노의 'ㅍ(피읖)'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면서 취업사이트를 뒤졌어요. 문서 작성일이었는데, 퍼스텍이라는 방산업체에 지원서를 냈는데 뽑혀서 출근을 했어요."

그는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오전 8시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했다. 간섭하는 사람 없이 하루하루 할 일을 끝내는 그 순간이 도피 같았지만 행복했다.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그 옆에서 서류 작업을 하면서 듣는 기계소리는 피아노 소리를 잠시나마 잊게 했다.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간식도 나눠 먹으면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그냥 좋았다.

"공장에 다녀서 알게 된 직함 중에 '직장'이라고 있는데, 그분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이 일은 늙어서도 할 수 있는데, 젊으니까 다른 일을 찾아서 해봐라.' 직장님뿐만 아니라 생산라인은 돌아가고 그 옆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저를 보는 분마다 진심 어린 걱정과 위로를 많이 해주셨어요. 제가 피아노 전공자인 걸 같이 일하는 분들도 다 아셨거든요. 이력서에 솔직하게 다 썼기 때문에. 비록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공연장상주단체 기획자로 뽑혀서 갔지만, 나갈 때 오히려 축하를 받아서 기분이 묘했어요."

짧은 공장 생활 이후, 공연장상주단체 기획자로 일했다. 꼬니-니꼬체임버앙상블, 경남페스티벌앙상블에서 공연을 기획하거나 행정적인 업무를 소화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 1일 김해 한 카페에서 한예란 피아니스트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정연 기자
▲ 1일 김해 한 카페에서 한예란 피아니스트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정연 기자

◇우연히 만난 피아노, 전공이 될 줄이야 = 남들이 생각하면 늦었을 수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처음 갔다.

"학원을 잘못 간 거죠.(웃음) 알고 보니 입시 전문학원이더라고요. 첫 콩쿠르에 나갔는데 무대에 올라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한 마디를 1분 동안만 치고 내려왔어요. 펑펑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오기가 생겨서 다음번에는 제대로 치겠다는 생각에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부산예고를 가서 창원대 음악학과까지 왔네요."

울산에서 태어난 한예란은 창원대 졸업 이후 김해에서 살면서 창원·김해를 주무대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클랑피아노앙상블 조직해
작은 학교서 연주회·합주
고대 철학 접목 무대 시도

◇클랑피아노앙상블 대표는 순환제 = "경험치를 나누자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독식하는 구조보다 대표를 2년 정도씩 돌아가면서 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연주단체가 연주만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기획·행정적인 부분도 부딪히고 해봐야 아는 법이니까, 경험을 공유하는 거죠."

클랑피아노앙상블은 창원대 음악학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한예란이 2016~2017년 대표를 지냈고, 강세영(2018~2019년)에 이어 지금은 김태현이 연주와 동시에 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 전체 단원은 10여 명으로, 매해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정기연주회를 열고 있다. 창원에서 개최하는 10회 정기연주회에는 김온유·안미숙·윤지운·이미성·이은지·황정희 등이 함께한다. 피아노 하나에 2~3명이 같이 앉아서 연주를 하거나 피아노 두 대를 마주놓고 연주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학교 배움터 찾아가는 음악회 = 산청 생비량초등학교, 거창 가조초등학교, 고성 하이초등학교. 이제는 잊을 수가 없는 학교 이름이 됐다. 클랑피아노앙상블이 2019년 경남도교육청이 진행하는 '학교로 찾아가는 문화예술전문가' 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군 단위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연주회와 합주활동을 펼쳤다.

"도착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더라고요. (웃음) 이름도 생소한 학교에 도착했을 때 어찌나 반겨주시는지, 토이피아노를 챙겨간 단원이 인기가 가장 좋았어요. 저희가 먼저 공연 형식으로 연주회를 하면서 관심을 집중시키죠. 이후에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학생들과 합주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에그셰이커를 흔들거나 리코더를 부는데, 음악으로 통한다는 기쁨을 아이들을 통해 다시 배웠어요."

클랑피아노앙상블은 진주 여름공연예술축제(2018년), 밀양도서관 초청 연주(2019년), 김해 지혜의바다 도서관 작은 음악회(2021년) 등 다양한 기획 연주를 하고 있다.

▲ 지난해 10월 김해 남명아트홀에서 선보인 '뮤즈'.  /한예란
▲ 지난해 10월 김해 남명아트홀에서 선보인 '뮤즈'. /한예란

◇철학과 음악의 만남, 생소한 독주회 = 한예란은 남들이 하지 않는 시도를 즐긴다. 지난해 10월 김해 남명아트홀에서 보인 독주회는 '뮤즈(MUSE)'를 테마로 열렸다. 뮤즈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을 뜻하는데, 고대 철학가의 음악 철학을 담아 피아노 연주로 꾸몄다.

플라톤이 주창한 '음악의 도덕적 영향력'을 주제로 모차르트 피아노 콘체르토 21번 2악장을 선보이고,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피력한 '좋은 음악은 듣는 이의 영혼에 좋은 영향을' 모티브로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2번 1악장과 그리그 피아노 콘체르토 1악장 등을 연주했다.

"음악은 예술가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관객의 다양한 요구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형식이기도 하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클래식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는 계속 해보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협연자와 소통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함께 연주하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박정연 기자 pjy@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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