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씻어내는 정자란 뜻의 토실한 마을
넉넉하면서 단아한, 그야말로 척번의 길

집을 나서면 으레 걸쳐야 하는 마스크 너머로 드러낸 눈초리들에선 경계의 기미가 역력했다. 잔기침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단박 분위기 서늘해졌다. 차마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리는 건 아닐지라도 모두 적의를 품은 듯 두리번거리던 참담한 세상이었다. 사람 얼굴에 장치된 근육이 80여 개고 그 힘살로 지어내는 표정이 7000~8000개라더라. 그중 8할깨나 천으로 덮여 가린 꼴이니 그 삼엄한 차단이야말로 감염의 불안에 못잖던 이태 동안이었다. 그 막바지에 갈린 정세로 TV 명색엔 눈짓도 꺼려지는 세상이 도래했지만 트인 곳에선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수혜를 이제 받았으니 그나마 살 것만 같다.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생긴 통에 한가로워진 길이 고성 가는 33번 국도다. 예전엔 굽은 왕복 2차로에다 오가는 차는 적잖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긴장된 길이었다. 고속도로 놓으며 덤으로 그 까탈스러운 코스를 넓힌 데다 곧게 다듬기까지 했으니 착하디착한 순로가 된 '상리' 가는 길은 그래서 항상 넉넉하다.

남강에서 벗어나 사천 언저리를 스쳐 30분 남짓 달리면 닿는 마을이 척번정이다. 어림해 100여 호나 될까? 이쪽 어귀에서 저쪽 어귀까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집들 사이로 정갈한 길이 있고 학교 교회 우체국 보건소 문화센터에다 복지관에 농협 파출소까지 갖추고 앉은 것이 기립을 게 없어 보이는 토실한 마을이다. 상리면 '척번정리'이니 작명 너무 난해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동네에 외가의 추억이 있는 김열규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이름이라 우겼었다. 척(滌)은 씻는다는 뜻이요 번(煩)은 괴로움이니 '번뇌를 씻어내는 정자'라는 것이다.

연못은 아름드리 나무가 교정을 채운 상리초등학교에서 상족암으로 오르는 길이 난 마을의 끄트머리에 있다. 해안을 따라 고성에 이르겠노라며 오래전 이 길을 지날 때 흘낏 보기엔 다듬어지지 않은 '늪'이 있고나 여겼는데 어느 날 보니 연꽃 만개한 공원 꼴을 갖췄더라. 얼추 학교 운동장만 한 못엔 여름이 가까워지며 피워내는 희고 붉은 연꽃과 달팽이 올챙이 우렁이 깍다구 등의 물벌레가 날마다 벌이는 은밀한 잔치판이다. 네모진 못 둑은 단아하고 편평하게 못을 감싸고 있어 연화를 완상하며 걷는 그야말로 척번의 길이다.

"'상리' 연꽃공원의 수수한 담백함을 아끼고 사랑해 해마다 여름 오길 기다리는 진주 사람입니다. 못 둑은 잔디 길이 좋습니다만 주차장서 둑으로 오르는 경사로가 없어 유모차나 휠체어가 접근치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중략) 봄부터 가을까지 화려하지도 번다하지도 않은 지금 딱 그대로의 상리가 지닌 고졸한 기품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살펴주시길 청원합니다."

올 2월 고성군 누리집 '군수에게 바란다'에 글을 올리고 5월에 가봤더니 알밤 같은 길이 예쁘게도 나 있더라. 게시판에다 짧은 청원 글 하나 올렸을 뿐인데 관청이 이리 능동적으로 시민 불편을 해결해 주다니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는 형용을 달아 그들 고성군의 공복님들께 치하 드렸다. 지자체 살림을 맡는 우두머리를 시민 손으로 뽑으며 변화된 세상의 단면이라 여기며 위로받는 사건이었다. 소년시절 척번정 외가의 기억을 잊지 못해 은퇴 후 산 너머 바닷가에 집을 짓고 진주 창원을 오가며 그 무궁한 박식을 뿜어내시던 그이도 가셨다. 척번정 못 둑에서 그이가 남긴 '메멘토모리'를 생각는다.

/홍창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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