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날려주던 '오래된 단짝' 에어컨·선풍기에 자리 내줘
예부터 판소리 소품 등 맹활약 이제는 어엿한 작품으로 변신

도시의 여름은 아무래도 농촌보다 뜨겁다. 기후변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열기를 식혀줄 환경이 아닌 데다 오히려 수많은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를 더한 때문일 것이다. 도시에서는 집들이 문을 닫고 산다. 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열기를 식히던 전통적인 방법과는 반대로 문을 닫고 찬바람을 쐰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손에서 부채를 놓게 했다. 하물며 길거리에서도 다들 손풍기나 어깨선풍기를 휴대하고 다니니 부채가 설 자리, 더는 없을 것 같다.

◇부채의 나이 = 부채는 언제 생겼을까. '손부채질'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친다면야 인간의 기원에 맞닿아 있을 테지만 도구를 사용해 바람을 일으키는 의미로 본다면, 학자들은 활엽수 나뭇잎을 이용한 데서부터 기원을 찾고 있다. 나뭇잎 부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찾아낸 부채의 재료가 새의 깃털이었다. 한자 부채 선(扇)에 깃 우(羽)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 부채의 기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중국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이러한 깃털부채를 들고 있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가 들었던 부채 이름이 '학우선(鶴羽扇)'이다.

이러한 깃털부채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황해도 안악군 안악 3호 고분벽화에 무덤 주인이 깃털부채를 들고 있으며 4호분에는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둥근(방구)부채가 나온다. 고구려의 고분에서 보이는 부채보다 더 오래된 부채가 창원시 동읍 다호리에서 발견됐다. 다호리고분군은 원삼국시대 전기의 것으로 서기전 1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깃털부채 자루가 발견되었으니 부채의 나이야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 부채가 동양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밝혀진 부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는 부채는 3000년 전의 이집트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황금봉에 타조 깃털을 붙인 부채다.

▲ 의령 일준부채박물관에 전시된 방구부채. /정현수 기자
▲ 의령 일준부채박물관에 전시된 방구부채. /정현수 기자

◇부채의 종류 = 나라마다 부채가 있으니 그 종류야 셀 수도 없겠다만 우리나라에서만도 다양한 부채가 만들어졌고 전해왔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가까이 통영에 있는 통제영에서도 부채를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단오선'이다. 여름이 시작되는 단오가 되면 궁은 물론이고 뭇 백성들도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부채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둥근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방구부채와 접을 수 있는 접부채 혹은 쥘부채다. 세세하게는 부채에 어떤 그림이 들어가느냐, 또 형태가 어떤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사용되었다. 한국민족대백과에 찾아보니 부채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나 싶다.

△방구부채 : 방구부채에는 오엽선(梧葉扇)·연엽선(蓮葉扇)·파초선(芭蕉扇)·태극선(太極扇)·아선(兒扇)·오색선(五色扇)·까치선·진주선(眞珠扇)·공작선(孔雀扇)·청선(靑扇)·홍선(紅扇)·백우선(白羽扇)·팔덕선(八德扇)·세미선(細尾扇)·미선(尾扇)·송선(松扇)·대원선(大圓扇)

△쥘부채 : 백선(白扇, 白貼扇)·칠선(漆扇)·유선(油扇)·복선(服扇)·승두선(僧頭扇)·어두선(魚頭扇)·사두선(蛇頭扇)·반죽선(班竹扇)·외각선(外角扇)·내각선(內角扇)·삼대선(三臺扇)·이대선(二臺扇)·단목선(丹木扇)·채각선(彩角扇)·곡두선(曲頭扇)·소각선(素角扇)·광변선(廣邊扇)·협변선(狹邊扇)·유환선(有環扇)·무환선(無環扇)

방구부채 중에서 송선이라는 것은 좀 특별한 부채다. 고려 때 있었다고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이 '고려송선'은 송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소동파가 고려송선에 관한 시를 남겼고 당시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은 만드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술할 정도였다.

쥘부채는 부챗살이 몇 개인지 그리고 면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무당이 쓰는 부채에는 해와 달, 세 부처, 네 명 혹은 여덟 명의 선녀, 모란, 소나무 등 벽사와 기원을 담은 그림이 들어가고 선비들의 부채에는 글이나 수묵화가 들어가는 등 신분에 따라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부채의 용도 = 부채라고 단지 부치는 용도에 국한한 것은 아니었다. 판소리 명창에게는 공연의 소품으로, 공중의 외줄 위에서 재담과 발림으로 묘기를 부리는 줄타기 광대에게는 균형을 잡는 도구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군무를 펼치는 전통무용수들에게는 부채춤의 소도구로 활용된다.

그뿐이랴.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과거급제 뒤 춘향모 월매를 만나러 갈 때나 어사출두를 외치고 등장할 때는 얼굴가리개용으로 부채를 썼다. 얼굴가리개용 부채는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나오고 각종 민화에도 종종 나타난다. 전래동화에도 출현해 부치면 코를 길게 하고 줄어들게 하는 빨간부채 파란부채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부채는 호신용 무기로 활용됐다. 무협 영화를 보면 상대와 싸우다 부채를 펼치면 거기에서 독침이 날아간다거나 철로 된 부채로 상대의 검과 대적하는 장면도 나오고 부채를 펼쳐 그것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통력을 보이기도 한다.

부채의 용도는 오늘날 산업 속으로도 깊숙이 들어갔다. 각종 행사에 당당하게 등장한다. 플라스틱 재료로 조잡하게 만들어 부채로서 본래 기능을 상실하긴 했으나 앞뒷면 가득 광고로 채워져 시민들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재능을 보인다.

▲ 롯데백화점 마산점 갤러리에 전시 중인 김구 문인화가의 합죽선 작품들. /정현수 기자
▲ 롯데백화점 마산점 갤러리에 전시 중인 김구 문인화가의 합죽선 작품들. /정현수 기자

◇작품이 된 부채 = 부채는 그 소재가 대나무와 한지로 정착하면서 그 널찍한 면에 다양한 그림이 장식되기 시작했다. 동선하로(冬扇夏爐), 겨울에 부채가 무슨 쓸모가 있겠냐 해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손에 쥐고 다녔다. 부채는 어느새 멋이 되었고 체면이 되었다.

지난 2월 타계한 석학 이어령은 <문화박물지>에서 "합죽선은 바람을 부친다는 기능을 다 빼내어도 그 형태나 색채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를 잃지 않는다. 오늘날의 전자제품들, 부채를 대신하고 있는 선풍기나 에어컨은 계절이 바뀌거나 고장이 나서 못쓰게 되면 한낱 추악한 넝마로 변해버린다. 옛날의 도자기들이 실용성을 잃어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골동품으로 애지중지되는 것은 단순히 옛날 것이라는 역사성 때문이 아니다. 부채는 겨울에도 부채인 것이다"라고 했다.

지난 22일부터 롯데백화점 마산점 더 갤러리에서는 문인화가 목원 김구의 초대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작품 중에는 예술작품이 된 부채가 활짝 펼쳐져 있다. 음식을 담던 도자기가 예술이 된 것처럼 부채도 신기술에 밀려 본래의 쓸모를 뺏겨가고 있지만 반대급부로 예술로서 설 자리를 굳히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랴.

/정현수 기자 dino999@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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