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귀화 삶 자체가 마라톤 같아
한 발씩 옮기다 보면 목표 이르리라

나는 오랫동안의 한국 생활을 거쳐 귀화 조건을 충족하고 시험을 통과해서 한국인이 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받으면서 불안한 전쟁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는 부룬디의 대학생 대표로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하고 곧바로 난민 신청을 하며 가슴 졸였던 순간들, 난민 지위가 인정되기까지 3년여 시간을 3개월마다 비자를 연장하면서 불안에 떨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초기에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그야말로 지뢰밭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첫 직장으로 소개받은 공장에서 나는 순간순간 좌절을 느껴야 했다. 직장 동료와 주변 사람들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나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기에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절망의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절망 중에서 나는 마라톤을 만났고 마라톤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한국 생활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마라톤은 나의 희망의 도구이며 나를 꿈으로 이끄는 좁은 길이었다. 운동을 하는 시간만은 세상의 온갖 근심을 잊었고 기록이 향상되는 기쁨으로 힘든 훈련을 버티고 이겨냈다. 한국 마스터스 마라톤 최고 기록을 세웠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마라톤 덕분에 한국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냈으니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셈이다.

나의 두 번째 마라톤은 한국 국적 취득이었다.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한국에 들어와 일한 기간, 수입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맞추어야 했다. 5년의 한국 생활과 회사 근무 등 조건을 충족하면 비로소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한 귀화 시험 응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기회를 얻은 것만 해도 기쁜 일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 느낀 감정은 좌절감이었다. 낯선 이름과 지명을 외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 등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시험 치러 가기 전 며칠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를 했다. 겨우 시험에 통과하고 법무부에서 합격증을 받고 귀화를 인정받던 날, 모든 귀화자를 대표해서 한국인으로 성실히 살겠다는 선서를 하면서 느꼈던 벅찬 마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마라톤은 학업을 계속한 일이었다. 나는 국립 부룬디 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때 한국에 왔다. 그리고 곧바로 난민 신청을 했기에 학력이 대학교 중퇴였다. 처음엔 한국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살았지만 차츰 적응해 가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경남대학교와 인연이 되어서 3학년에 편입했고 연이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았다고 나의 삶이 크게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배움에 대한 갈망을 채웠으니 그것만으로도 큰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는 것에서 삶의 영역으로 배움의 유용성을 확장해 나갈 일을 고민하는 중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마라톤에 입문한 뒤 나는 많은 경기에 참가했고 우승의 기록도 얻었다. 하지만 실제 시합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방인으로 이주해 와서 남의 나라에 사는 일 자체가 험난한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일 같았다. 멀고 아득해 보이는 42.195㎞의 마라톤도 몰입하고 집중하여 뛰다 보면 어느새 결승점에 도착한 것처럼 삶의 고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렵고 힘들어도 묵묵히 한 발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성취의 결승점이 눈앞에 다가와 있으리라 믿으며 나는 오늘 한국에서의 네 번째 마라톤을 뛰고 있다.

/김창원 부룬디 출신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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