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주공화정' 국민이 쟁취한 것
투쟁에 민중·지역 응답함으로써 성취돼

1987년 6월 10일 마산에서는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도 두려움을 잊고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 이는 당시 시위의 1열을 책임진 박재혁 경남대 학생회장의 증언이다. 당일 마산 시민들은 봉쇄된 3.15의거탑을 뒤로하고, 분수로터리, 6호 광장을 거쳐 이집트와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종합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루탄으로 경기가 중단되자, 관중들은 시위에 합세해 양덕파출소와 민정당 국회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을 파괴했다.

6월 11일, 창원대에서는 학생 600여 명이 독재종식을 위한 투쟁 대회를 개최하고, 시내 코아양과 주변에서 시위를 지속했다. 12일 역시 창원대에서 300여 명이 독재종식을 위한 투쟁식을 거행하고 밤밭고개 국도에서 가두시위를 했다. 13일에는 경남대생 100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교내시위 후 시내로 진출했다. 15일에도 경남대생 5000여 명이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마산시내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했다. 당시 전국적인 시위 양상을 기록한 <한국민주화 운동사>에서 마산을 가장 끈질기게 87년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지역이라는 평가를 하게 한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경 당시 경남대 재학 중인 정성기는 시위 준비 모임을 하다, 이미 시위가 터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얼굴을 가리고 마산경찰서 지하로 끌려가서, "발가벗긴 후 철봉 같은 데 매달더니, 수건 하나는 얼굴에 덮고, 물을 막 부은 후에, 배후세력을 추궁받았다." 같은 날 오후 9시 40분경, 오동동파출소 부근 동성병원 앞에서 200명의 데모를 주도하던 창원공단 미원중기 회사원 이창식은 잠복해 있던 경찰 곤봉에 맞고 실신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여덟 바늘을 꿰매고, 오동동파출소로 연행되었다. 옷 위에 매직으로 주동자로 낙인하고, 10월 27일 아침에는 '너거는 햇빛 다 봤다'고 하여, '이거는 죽는거구나' 하고 여기고 부산 헌병대로 이감되어 43일 구금생활하게 된다. 이 두 분은 6월 10일 행정안전부 주최, 35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79년의 부마항쟁은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시민들이 일어난 항쟁이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선거제도는 1972년 유신헌법에 의해 부정당했고,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다시 쟁취됐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닌, 쟁취된 것이었다. 국민의 민주주의 쟁취 노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정권에 번번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1979년 10월 18일 0시 부산에 발효된 계엄령, 10월 20일 마산에 발효된 위수령은 결국 1980년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또다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헌법이 만들어진다. 1986년 내각제를 염두에 둔 개헌을 약속한 후 번복하고, 1987년 4.13 호헌 조치를 선언하게 된다. 6월 중순 시위가 격화되자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준비했으나, 전국적인 시위양상에 말미암은 진압 위험성과 미국 압력으로 포기하고,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선언하게 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은 1979년 부마항쟁의 유신독재 타도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어받은 투쟁이었다. 민주주의는 지식인이나 학생들 주도에 민중이 합세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성취된다. 이를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응답하는 시민과 응답하는 지역으로 설명한다. 그렇다, 응답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성취되지 않는다.

/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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