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읍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적들
경남지역 고대인들의 예술·영광 품어

창녕은 우포늪과 화왕산의 자연 경관도 좋지만 경남의 경주라 할 만큼 주목할 만한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그 위치가 창녕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10∼20분 정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슬슬 걸으면서 천년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교동고분군에서는 가야 권력자들의 무덤 사이를 거닐면서 창녕읍내를 내려다보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지개를 펴도 좋다. 길 건너 박물관에서는 예쁜 토기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고조선 시대의 바다에 띄워졌을 배와 '대간(大干)'이란 글씨가 있는 토기도 구경하자. 가야인이 직접 써 놓은 몇 안 되는 문자 자료이다. '우두머리'라는 뜻의 가야인 언어이기도 하다. '대간'의 '간'은 신라에서 임금을 가리켰던 '거서간'의 '간'과 같으며 '칭기즈칸'의 그 '칸'과도 통한다.

살짝 내려와서 길 하나 건너면 무려 561년에 제작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도 구경하자. 이 비석은 진흥왕이 직접 창녕까지 와서 창녕이 신라 땅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선언문과 같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기도 하다. 당시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아직 버티고 있던 시절이라서 좀 복잡한 심정이다. 당시 신라군은 우리 경남인들에겐 점령군이었을까, 해방군이었을까?

길 하나 살짝 건너서 10분 정도 걸으면 불국사 석가탑에 비교할 만한 매끈한 탑을 만날 수 있다. 산속 절 앞마당이 아니라 시장 근처 그것도 주택가에서 만나는 지정된 탑이 놀라게 한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인데 인근의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을 보면 왜 하나는 국보이고 하나는 보물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시장에서 잠시 쉬었다가 군청 쪽으로 가 보면 역시 주택가에서 작은 비석 하나를 볼 수가 있다. 예전에는 논이었을지도 모를 약간 생뚱맞은 곳의 비각 안에 비석이 있다.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이다. 이 비석 뒷면을 보면 놀랍게도 스님인지 보살인지 알 듯 모를 듯한 조각이 있다. 현재는 스님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스님의 조각상이다. 810년에 세운 것인데 부처나 보살이 아닌 사람을 새긴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그 앞면에는 3∼4㎝ 크기로 한자를 새겨 놓았는데 27자씩 9줄, 마지막 1줄은 26자 모두 269자가 있다.

이 비석에 새겨 놓은 글자는 한자이지만 문장은 한문이 아니라 이두문이다. 269자의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적어 놓았다. 우리말 어순의 이두 금석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탑과 금당을 고치고 세운 글을 쓴다'를 '塔金堂治成文記之'라고 적어 놓았다. '금당'은 요즘의 법당에 해당하므로 '탑(塔)과 법당(金堂)을 고치고(治) 세운(成) 글을(文) 쓴다(記之)'라는 말을 위와 같이 적어 놓은 것이다. 한자로 적었지만 중국말 아닌 당시 신라말로 쓴 글이다.

이 비석에 써 놓은 내용 가운데 가장 놀라운 점은 임오년(802년) 서울의 봉덕사(奉德寺), 영흥사(永興寺), 천암사(天巖寺), 보장사(寶藏寺) 등에 2713석을 지원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당시 창녕과 창녕에 있었던 인양사라는 절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해에 인양사의 '삼보(三寶)에 954석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한 사찰에서 운용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다.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큰소리 치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창녕은 경남 고대인들의 빼어난 예술과 영광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곳이다.

/박용식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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