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앓은 소아마비로 장애
여러 사람에게 도움 받으며 성장
10년 전 여행 간 라오스에 매료
우연한 기회로 현지 의료봉사 시작

 

아짠. 라오스어로 '선생님'이란 뜻이다. 라오스에서 조근식(65) 약사는 '아짠 조'라 불린다. 2012년부터 10년간 라오스 봉사 활동하면서 얻은 애칭이다. 라오스 사람들을 위해 의약품과 생필품을 전해줬다. 학교도 세우고 주변 마을을 일으키면서 공생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면서 그의 나눔의 경험이 재조명받고 있다. 24일 창원시 의창구 명서동에서 그를 만났다. 지금 그는 이곳에서 '텔레팜the큰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사는 동안 조 약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겠다는 마음은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생후 10개월, 그는 소아마비로 3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직도 다리를 절뚝인다. "장애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어요. 친구가 많았어요. 저는 비 오는 날 학교 가는 게 힘들었거든요. 우산도 써야 하니까. 동네 친구가 가방을 들어주곤 했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정말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나도 언젠가 다른 사람을 돕고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 조 약사가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아이들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조 약사가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아이들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울려 사는 삶 = 봉사하는 방식도 어릴 때 깨쳤다. 가끔 학교에 부실한 도시락을 가져오는 친구들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조 약사는 "누군가에게 줄 때 방법이 잘못되면 욕을 먹는다"며 "내가 먹어보니 너무 맛있더라 같이 먹어보자고 얘기하면 상대방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린 날의 기억이 지금의 조 약사를 있게 했다.

돈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약대에 진학했다. 의대는 졸업하고 나서도 공부를 계속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래로 남동생만 세 명이었다. 약대를 졸업하고 1981년 약국을 처음 열었다. 그는 약국을 찾는 손님을 가족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몸이 불편하고 아파서 온 손님에게는 따스함이 필요했다. 조 약사는 "내 가족에게 약을 지어준다는 마음으로 양심을 어기지 않고 처방한다"며 "약에도 단가가 있는데 절대 손님을 속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 라오스에 학교 짓는 봉사를 하고 있는 조근식 약사가 창원시 의창구 약국에서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 라오스에 학교 짓는 봉사를 하고 있는 조근식 약사가 창원시 의창구 약국에서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지역 사회에도 보탬이 되고자 애썼다. 창원대 교육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창원윈드오케스트라'도 창단했다. 약사회 송년 음악회와 경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순회 음악회도 열었다. 문화 지원 차원에서 사비를 털어 오케스트라에 지원했다. 밀양시의 야외 음악당 개설을 끌어내기도 했다. 문화가 닿지 않는 지역을 찾아가 피아노 반주 음악회를 연 적도 있다.

그는 혼자인 적이 없었다. 어딜 가나 이웃과 어울려 사는 삶을 택했다. 조 약사가 밀양에서 일할 땐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어떤 병에 걸리는지 연구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일하면 몸 안에 활성산소가 많이 생기고, 암에도 취약하다. 조 약사는 농업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건강 교육을 했다. 또, 인근 초등학교 운동회나 수학여행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라오스는 나의 인연" = 2012년, 라오스 여행을 갔다. 그는 라오스에서 순수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가방을 훔쳐 달아나는 이가 없었고, 때리고 덮치고 습격하는 건 사람이 아닌 들개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동남아 지역을 가면 아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면서 따라오지만, 라오스 아이들은 사탕을 주려고 하면 부끄러워서 뒷걸음질을 쳤다.

한 번은 식당에서 머리에 왕부스럼이 난 아이를 만났다. 약사답게 상비약을 챙겨 다니던 그는 아이에게 약을 발라줬다. "한 달 뒤에 다시 와서 봐줄게"라고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라오스를 다시 찾았다. 그때부터 조 약사는 라오스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 조 약사가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지은 한 학교에서 2021~2022년 장학금 수여식이 열리고 있다.
▲ 조 약사가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지은 한 학교에서 2021~2022년 장학금 수여식이 열리고 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씩 라오스를 찾았다. 처음에는 의료 봉사로 시작했다. 구충제를 가져다주러 갔다가 우물도 파주고, 수도 상태가 열악한 걸 보고 물탱크를 지어줬다. 그러다 학교를 찾아갔다. 교실에는 소똥이, 벽은 싸릿대로 겨우 가려져 있고, 천장도 반쯤 내려와 있었다. 이를 본 조 약사는 그동안 라오스에 20개의 학교를 지었다.

"봉사단체를 보면 학교만 지어주고 끝인 경우가 많아요. 운영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거나, 지원해주지 않아요. 학교만 지어주면 안 되거든요. 에어컨만 주면 전기료가 들어가는 걸 고민해야 하잖아요. 봉사는 한 번 주고 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안 해준 것만 못해요."

조 약사가 세운 학교는 '무상교육'을 한다. 한 사람이라도 교육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가르치는 아이들 중 누가 라오스를 살리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학교를 짓다가 아이들의 집에도 들렀다. 오리와 닭이 함께 살고, 잠도 자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학교를 지어보니 집은 쉬울 것 같았다. 조화로운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각자의 아름다움과 여러 계층의 사람이 어울려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레인보 빌라'를 5호까지 지었다.

라오스 수파누봉대학교에 한국어학과도 만들었다. 한 학년에 45명씩. 1~3학년까지 140명이 한국어를 배운다. 조 약사는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라오스 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기술을 배워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며 "이렇게 한국을 찾는 라오스 학생이 많아지면 라오스와의 인연도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 조 약사가 라오스 수파누봉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근식 씨
▲ 조 약사가 라오스 수파누봉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근식 씨

이날 조 약사는 양 손목에 형형색색의 실을 동여매고 있었다. 라오스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이자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자는 의미에서 매어준 팔찌라고 한다.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닫히면서 라오스에 가지 못한 지 오래됐다. 조 약사는 동여맨 실을 보면서 라오스를 자주 떠올린다. 라오스 비행기 편이 마련되면 곧장 떠날 생각이다.

"저는 라오스에서 살 거예요. 아마 라오스에서 죽지 않을까요. 매달 보름마다 갔는데, 앞으로 가는 날을 늘릴 생각이에요. 내 눈으로 하나라도 더 보고,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려고요. 그러다 라오스에서 생을 마감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김다솜 기자 all@idomin.com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