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백성이 물·통치자는 배라 했는데
퍼주기 공약과 아시타비 다툼으로 날 새

은근한 봄기운이 저 깊은 땅속에서부터 올라오는지 대지의 들썩거림이 선명하다. 매화는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코를 찌르는 향기를 풍긴다고 했던가. 옛 선비의 뜨락에 남명매(南冥梅)가 환하게 피어 박비향을 물씬 풍긴다는 소식에 이끌려 산천재를 찾게 되었다.

이 학당은 조선 중기의 큰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평생 동안 갈고닦은 학문을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산천(山天)' 이란 말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주역>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당호에는 학문과 심성을 도야하면서 헛된 욕망을 경계하겠다는 남명의 투철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건물은 낡고 대의를 위해 맞서던 서슬 퍼런 선비의 지조와 기개는 쉬 찾을 수 없었지만, '부끄러움과 두려움, 뉘우침이 사람이 되는 바탕'이라고 일깨워주시는 선생의 사상과 실천정신은 편액과 주련, 시판 등속의 현액 속에 여전히 살아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옛 선비의 꼿꼿한 정신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벽화는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는 이의 눈길을 머물게 했다. 중국 태평성대로 불린 임금 요가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준다고 하자,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천에 귀를 씻고 기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는 고사를 형상화한 그림에서 목숨을 건 위언으로 부패한 조정과 군왕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던 산림처사, 남명 선생의 지조와 절개, 기품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올해로 440여 년 연륜을 헤아리며 고결한 품격을 높이 사고 있는 남명매의 그 고아한 자태를 감상하고자 했던 걸음에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살고자 했던 남명 선생의 맑은 정신을 배알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는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준하 선생을 비롯해 성철·법정·김수환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세상의 등불 역할을 했다. 현실은 어떤가.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원로나 경륜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말해야 할 위치에 있는 셀럽들조차 몸 사리고 입 꾹 닫고 숨으니 오만과 독선, 그리고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고 결국 대선 정국까지 혼탁하게 하고 있다.

중우정치로 흐르는 작금의 세태를 남명이 보았다면 뭐라고 하실까? 코로나 극복, 기후 위기 대응, 미·중 갈등 속 한국의 출로 모색, 양극화 해소, 저출생 위기 극복, 청년들의 불안한 미래 해소, 지역 균형 발전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카드깡, 주술과 무속, 쥴리… 저급한 추문과 폭로전으로 날이 샌다. 표심을 현혹하려는 사탕발림 식 무차별 퍼주기 공약이 범람하고 허명을 훔치려는 추종자들끼리 아시타비, 내로남불, 아닥치듯 다툰다. 옳고 그름보다 우리 편이 더 중요하다는 듯 이들의 어이없는 주장을 듣노라면 정말 귀를 씻고 싶다. 이리해서 장차 그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한들 "온갖 천재와 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할 수 있으리오." 사화와 외척의 발호로 어지러운 시대를 겪으면서 임금의 무지를 꾸짖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주창했던 남명의 추상과 같은 질책이 오늘 현재를 향하고 있다. "백성은 물이요, 통치자는 물에 뜬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민심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 배(통치자)는 모름지기 물(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민암부(民巖賦)>에서 한 이 말이 불행히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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