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마을 어귀에 목장승 두 기가 위엄있게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왠지 두려운 마음에 몸이 움츠러들곤 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목장승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엔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장승 이야기는 어느새 일상을 떠나 책 속으로 들어갔다. '볼기 맞은 장승'처럼 장승은 그렇게 수많은 동화 속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어쩌면 그런 장승의 활약이 다시 이야기 밖으로 나오게 했을지도 모른다. 장승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면서 여러 곳에 장승학교도 생기고 마을 어귀에 다시 장승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장승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또 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데 둘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사찰 지키고 섰던 '벅수'
동네 어귀서 '장승'으로
험상궂고 위엄 있던 얼굴
세월 흘러 우스꽝스럽게

◇벅수와 장승은 어떻게 다르길래 = 교과서나 이야기책에선 '장승'이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이름이 있다. '벅수'라고 한다. 벅수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통영에 벅수골이 있고, 그 이름을 딴 극단명이 또한 '벅수골'이어서다. 벅수라는 말은 불교의 화엄경에 나오는 '법수보살'에서 왔다. 법수가 벅수로 변한 것은 '거붑'이 '거북'으로 변한 것처럼 언어 변화 때문이다.

'벅수'는 사찰을 지키는 존재다. 주로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서 있다. 우리네 불교가 민간신앙과 얽히고설키면서 독특한 종교 세계를 형성했는데, 사찰을 소도와 유사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도에는 솟대라는 것이 서 있다. 긴 장대 끝에 새 형상을 만들어 세운다. 새가 장대 끝에 장식된 이유는 전통적으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게 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깃발에 '태양의 새'로 삼족오가 그려진 이유도 그렇다.

하여튼 신성한 곳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절에 들어가려면 먼저 벅수를 통과해야 하고 이어서 사천왕의 부리부리한 눈을 의식하며 지나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덜미가 잡힐 것만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 창녕 관룡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여자 돌벅수.  /정현수 기자
▲ 창녕 관룡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여자 돌벅수. /정현수 기자

절에서 그러한 절차를 밟아야 하듯 마을에서도 그런 절차가 있었다. 대체로 마을에선 그 역할을 당산나무와 벅수가 했다. 벅수는 지금 '장승'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대체되어 불리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말하자면, 장승은 원래 수호신의 역할이 아닌 조선시대 역참제도에 의해 생긴 길 안내판, 길라잡이였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벅수가 장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수호신 역할이 강한 것이면 벅수로, 이정표 역할이 강하면 장승으로 표기하면 될 것도 같지만 대개 두 가지 역할을 다 하는 경우도 많아 고민이긴 하다.

하여튼 벅수는 경상도에서 어리석은 사람을 비꼬아 표현하는 단어로 호출되기도 해 난감하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죄지은 사람이면 한방에 혼쭐낼 위엄의 상징이었던 벅수가 왜 멍청이로 내동댕이쳐졌을까. 추측이긴 한데, 우리네 정서에 '호작도'란 민화에서처럼 그 무서운 호랑이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장승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 거제시로 통합되기 전에 장승포시가 있었다. 거제 동부 능포동 장승포동, 마전동 옥포1·2동, 아주동 등이 옛 장승포시였다. 장승포라는 말이 붙은 것은 장승배기에서 비롯됐다. '배기'는 '언덕배기'처럼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는 비탈진 곳을 뜻하는데 그곳에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장승(長承)의 원래 표기는 장생(長生)이다. 역참제도에 의해 생긴 말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우리말로 장생·장성 하던 것이 한자 '長生'으로 표기되었고 그 역할은 '여기서부터 어디어디다'라고 하는 표지 기능이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나는 '여기서부터 경상남도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경계안내판과 같다. 그것을 옛날엔 '장생표주' 혹은 '장생표탑'이라고 했다. 이 장생표 기둥은 나무로 된 것도 있고 돌로 된 것도 있는데, 고려시대엔 사찰 앞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기원을 바탕으로 유추하면, 장승의 기능과 벅수의 역할이 묘하게 섞이면서 오늘날의 장승이 되지 않았나 싶다. 원래 표지판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던 장생표가 벅수와 얽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점점 진화하여 장승과 어감이 비슷한 정승의 모습이 되어 벼슬아치 감투까지 썼으니 어쩌면 장승의 승승장구에 비해 벅수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면서 초라해져 버린 느낌이다.

▲ 창원시 대산면 수성마을 벅수 한 쌍. 무서운 형상을 했던 예전과 달리 최근 벅수장승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다.  /정현수 기자
▲ 창원시 대산면 수성마을 벅수 한 쌍. 무서운 형상을 했던 예전과 달리 최근 벅수장승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다. /정현수 기자

벅수 얼굴 치우천왕·처용 닮아
제주선 '돌하르방'으로 큰 사랑
최근 벅수장승 대중 관심 늘어
곳곳에 설치·작품으로도 인기

◇수호신으로서 벅수와 닮은꼴들 = 엄밀히 따지면 벅수와 장승을 따로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 언어표기상으로 이 둘을 같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벅수'로 통일한다. 벅수를 자세히 본 사람은 그 얼굴이 사람의 형상이긴 하지만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왕방울만큼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 뭉툭한 코, 볼록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입술 사이로 비어져나온 송곳니. 누가 봐도 '너, 내가 지켜보고 있어' 하는 표정이다.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벅수의 얼굴이 그러하기에 수호신으로서 위상이 지켜졌을 것이다. 벅수의 얼굴은 오광대에서도 발견된다. 말뚝이를 비롯해 사자도 얼핏 그러한 얼굴이다. 특히 오방신장 다섯 장군의 얼굴은 벅수와 크게 닮았다. 황제·청제·백제·적제·흑제장군은 동서남북에서 지역방어를 맡은 수호신이 아니던가. 이러한 오방신장의 이름에서 장승이라 불리는 벅수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나 싶다. 둘이 있는 벅수가 남녀로 묘사된 것은 우리네 음양오행 철학 때문이다.

벅수의 얼굴은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대∼한 민국!' 월드컵 때 축구경기장뿐만 아니라 온 거리를 점령했던 붉은악마, 치우천왕의 모습도 비친다. 그뿐인가. 신라 향가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과도 닮았다. 바다를 건너간 벅수는 구멍 숭숭 뚫린 투박한 모습의 돌하르방이 되어 그곳에서는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경상도에서 바보천치 취급을 받던 벅수가 제주에 가서 출세했다. 할아버지 어른으로 모셔지고 있으니.

▲ 창동 한 식당 앞에 있는 벅수.  /정현수 기자
▲ 창동 한 식당 앞에 있는 벅수. /정현수 기자

◇예술로 승화하고 있는 벅수 장승 = 벅수도 이제 작품이 되어 전시되고 있다. 여러 지역에 장승축제마저 생겼으니 벅수장승 전성시대인가. 지난주 1주일가량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상상갤러리에서 한국장승학교 이도열 교장의 부녀동행 탈 작품전이 있었다. 이때 전시된 작품 중에 벅수 탈을 몇몇 만났는데, 그 모습이 희로애락을 담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며 근엄하기도 하며 다양하게 나타났다.

마을 어귀에 다시 벅수장승이 서고 있다. 이젠 예전과 달리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온화한 모습이다. 이름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대신 '오시리요 가시리요'라고 붙였다.

벅수장승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다. 상상해본다. 앞으로 어떤 얼굴로 벅수는 다시 나타날까. 혹시 도깨비 얼굴의 벅수가 나오지는 않을까. 누군가에 의해 벅수가 한류를 이끄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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