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첫날 첫 해 보며 시작
의미 있는 연례행사로 정착
정동진·호미곶 등 명소 탄생
일본 '신도'문화 영향설도
조선시대 해돋이 기록 확인

2022년 새해 첫날, 코로나 확산 때문에 많은 해맞이 명소가 통제되었음에도 새해 소원을 빌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새해맞이는 큰 의미가 있는 연례행사가 됐다.

한 해 소원을 비는 의식이기에 동네 뒷동산 혹은 마을 앞바다에서 해맞이하기보다 아침해의 기운을 좀 더 느낄 수 있고 풍경 좋은 곳을 찾아 나서다 보니 해맞이 명소도 생겼다.

◇해맞이 명소에 얽힌 이야기 = 우리나라 해맞이 명소는 강릉 정동진, 포항 호미곶, 지리산 그리고 제주 성산일출봉 정도로 가늠해볼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명소라고 알려진 곳은 수없이 많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욕망이 일출 명소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동진'이라는 지명은 순전히 서울 중심 인식이 만들어낸 이름이다. '광화문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는 나루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일출이 멋진 곳으로 알려졌지만 드라마 <모래시계>를 계기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호미곶도 유명한 일출 명소이긴 하나 이 이름만으로 일출과 연관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포항의 옛 이름이 '영일'인 점을 고려한다면 무관하지 않다. '호미(虎尾)'라는 말은 '호랑이의 꼬리'라는 뜻이다. 육당 최남선이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백두산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는 모습이라고 했는데, 그 호랑이의 꼬리 끝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호미곶이다. '곶'이라는 말은 '코'와 같은 의미로 '바다로 툭 튀어나온 육지'라는 뜻이다. 장산곶·간절곶 같은 지명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곶이 있는 곳에는 '만'이라는 바다가 있기 마련이다. 포항의 옛 이름이 '영일(迎日)'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해를 맞이하는 곳'이며 그 사이에 끼어있는 바다가 가수 최백호의 노래로도 유명한 영일만이다.

▲ 지난 1일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고자 해맞이 명소가 폐쇄되자 시민들은 집과 가까운 곳에서 해맞이를 했다. 이날 오전 7시 50분 시민들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제일여고와 마산중앙고등학교 사이 주택가에서 새해 첫 해를 바라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지난 1일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고자 해맞이 명소가 폐쇄되자 시민들은 집과 가까운 곳에서 해맞이를 했다. 이날 오전 7시 50분 시민들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제일여고와 마산중앙고등학교 사이 주택가에서 새해 첫 해를 바라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옛날부터 해맞이 풍습이 있었을까 = '영일'이라는 지명까지 있는 것을 보면 우리네 전통문화에 '해맞이'는 분명 있었겠다. 그런데 양력으로 새해인 신정에 이뤄지는 해맞이라는 점에서 하나 의문이 든다. 일본을 통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양력'이라는 책력을 썼지, 우리는 오랜 세월 '음력'을 기준으로 세시풍속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해는 '설날'인데 이 설날 아침에 해맞이를 위해 명소를 찾아 멀리 간다? 새해 아침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풍습이 오랫동안 굳어진 터라 새해 아침에 해맞이 간다는 것은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째서 새해 해맞이가 의식처럼 굳어지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해 기록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새해 풍습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 '신도(神道)'가 국가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해맞이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1월 1일 일본의 <매일신보>에 '해상일출'이라는 단가(와카)가 실렸는데, 당시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일제의 상징 '욱일승천'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어서 기분이 묘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도 집단적인 해맞이는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양 낙산사, 해금강 총석정, 지리산 천왕봉은 옛사람들도 자주 찾은 해돋이 명소였다. 1796년 조선 영조 45년 의유당 남씨가 쓴 여행기인 <동명일기>에는 동해 일출 장면이 묘사돼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1586년 선조 19년에는 선비 양대박이 지리산에서 일출을 보고 '두류산기행록'을 남겼고, 해금강 총석정을 찾은 연암 박지원은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또 겸재 정선의 여러 해돋이 그림이나 송강 정철의 '낙산사도', 19세기 왕실 화원 백은배의 '구경대 일출' 등 그림이 이를 증명한다.

◇다른 나라에도 해맞이 풍습이 있을까 = 유럽의 많은 나라는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해맞이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라마다 제각기 다른 새해맞이 풍습은 있지만 해 뜨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의미를 두는 나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개 자정을 계기로 새해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인다. 이탈리아는 자정에 종이 울리면 불꽃놀이가 시작되는데 이때 옆 사람과 세 번 키스한다고 하고, 스페인에서는 샴페인과 함께 포도 12알을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는 자정이 지나면 동전이나 빵·소금·위스키 등을 들고 이웃집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새해로 넘어가는 자정 상황을 기념하고 축하하다 보니 일찍 일어나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정착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추측된다. 우리 역시 섣달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며 날을 새우는 풍속이 있어 다음날 아침 일찍 해맞이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설날 아침 세배와 차례 등 치러야 할 행사가 적지 않다는 점도 해맞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여건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해맞이 풍속이 정착한 것은 우리에게 새해라는 개념이 양력과 음력으로 나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음력 설날에 차례를 지내고 양력인 신정에는 해맞이 가는 형태의 풍습이 굳어진 듯하다.

해맞이 풍습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것이 그대로 왔다는 보장도 없다.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 토템이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도 태양과 관련 있는 것을 보면 이 땅에 살았던 우리네 조상들의 인식에 태양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몽골에서는 해맞이 풍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설날이 되면(몽골도 음력설을 쇤다) 일찍 산에 올라가 새해를 맞이한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돌을 쌓아 만든 '어워'에 우유를 뿌리는 등 음식을 바치고 돌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 해맞이 풍습이 태양신 토템이 오랫동안 뿌리박힌 아시아 북방계 민족들의 공통 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는 날, 새로 시작하는 날이라는 뜻을 지닌 설날이 어쩌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개념의 새해일 것이다. 신정에 해맞이하지 못한 사람은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가 시작되는 날인 2월 1일 설날에 해맞이하며 한 해 소원을 빌어보자.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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