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 고마워... 몸 피곤하지만 보람 있고 뿌듯"

집안에는 40여 개의 표창장이 산처럼 쌓여 있다. 표창장의 주인공은 창원에서 '박영수손짜장'을 운영했던 박영수(56) 대표다. 그는 창원과 거제, 의령, 함안 등을 오가며 지난 25년간 손짜장 음식 봉사를 해왔다. 굵은 마디와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지역 사회에 꾸준히 '나눔'을 전했다.

수많은 표창장은 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물이다. 많을 땐 1년에 4~5개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2021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시상식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사회봉사와 나눔 실천으로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음식 봉사를 하면 몸은 피곤하지만, 보람이 있고 뿌듯해요. 사람들이 잘 먹었다고 하면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게 사람 사는 거구나, 정이라는 거구나 싶어요."

1997년 마산 양덕동 태화루를 인수해 '박영수손짜장' 간판을 내건 뒤 그는 꾸준히 짜장면 음식 봉사를 해왔다. 의무 경찰, 홀몸 어르신, 노숙인 등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짜장면을 내왔다. 그의 외길에는 아버지와 얽힌 추억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배고프던 그때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 25년간 음식 봉사를 해온 박영수 손짜장 대표. 박 대표가 그간 사회봉사와 나눔실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한 표창장만 해도 40개가 넘는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25년간 음식 봉사를 해온 박영수 손짜장 대표. 박 대표가 그간 사회봉사와 나눔실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한 표창장만 해도 40개가 넘는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 음식 = 다섯 남매의 둘째. 위로는 형 하나, 아래로는 여동생 셋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도 먹거리는 없었다. 쌀밥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쌀밥 한 숟가락 남기진 않을까 다섯 남매가 밥그릇만 쳐다봤다. 남는 쌀밥이라도 맛보고 싶어서다.

학교 점심시간이면 누구는 계란 프라이와 멸치, 어묵 볶음 반찬을 화려하게 펼쳐놨지만, 박 대표는 그러지 못했다. 항상 보리밥에 김치나 젓갈로 끼니를 때웠다. 때때로 김치국물이 흘러 젖은 책가방을 내려놔야 했다. 김치 쉰내가 교실 안을 가득 채우면 선생님께 욕먹기 일쑤였다.

그의 아버지는 마산 중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집안에 입이 많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일했다. 아버지는 다른 집의 논과 밭을 갈아주기도 했고, 도시로 나가 미장이나 목수일을 하기도 했다.

 

25년간 손짜장 음식 나눔 실천
한 달 4번 요양시설 등 찾아
배곯았던 어린 시절 떠올리면
어렵고 소외된 이웃 못 지나쳐

 

집에서 소를 키워 함안 읍내로 나가 내다 팔기도 했다. 그때마다 가족들은 호사를 누렸다. 박 대표는 "소 파는 날은 드물게 목돈을 만졌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아버지가 꼭 짜장면을 사주셨다"며 "지금은 짜장면이 흔하지만 그때는 귀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속병이 있으셨는지 박 대표가 19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음식 봉사로 연결됐다. 그는 "옆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으면 그립고 생각나는 법"이라며 "부모 같은 분들에게 짜장면 한 그릇 부담 없이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지금도 아버지 산소를 찾을 때면 짜장면 한 그릇을 꼭 들고 간다고.

어린 날의 기억은 박 대표를 소외된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쉬는 날까지 내어가며 음식 봉사를 했다. 지금도 한 달에 4번은 무료 급식소나 요양시설 등을 다닌다. 많을 때는 하루 1200그릇의 짜장면 음식 봉사를 하고자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공로 인정받은 표창장 수십 개
코로나19로 대량 급식 어렵지만
거리 두기 지키며 봉사 이어가

 

◇지역 곳곳을 다니며 봉사 = "언젠가 의령군으로 짜장면 음식 봉사를 간 적이 있어요. 할머님 한 분이 짜장 두 그릇을 드시고, 장까지 싸서 가시더라고요. 그렇게 음식 봉사를 하면 할매, 할배들이 오이도 주고 호박도 줘요. 돈이 어디 있습니까. 고맙다고 그렇게 성의를 표시해주시는 거죠."

음식 봉사 경험을 돌아보면서 그는 내어준 것보다 얻은 걸 먼저 떠올렸다. 배 타고 1시간 30여 분을 나가야 하는 섬에서 음식 봉사를 하면 조기와 고등어가 한가득 담긴 상자가 돌아오기도 했다.

함안군에 있는 장애인 재활 작업장에 갔을 때는 푹푹 찌는 컨테이너 속에서 짜장면을 먹는 이들을 봤다. 성치 않은 식탁 위에서 땀 흘리면서 밥을 먹는 모습에 그 자리에서 200만 원을 내놓은 적도 있다. 에어컨이라도 사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시원하게 밥을 먹게 해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감사 인사 하나로 충분했다.

인정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시선에 감회는 새롭다. 박 대표는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장사 홍보하려고 저렇게 하는 거란 소리도 많이 들었다"며 "수십 년 동안 계속 음식 봉사를 하니까 이제야 인정받는 거 같다"고 했다.

코로나19가 길어지자, 음식 봉사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됐다. 방역수칙 위반으로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기도 힘들어서다. 예전에는 100~200명씩 모실 수 있었으나 이제는 쉽지 않다. 매장 내에서 거리 두기를 지키면서 음식 봉사를 겨우 이어왔다.

▲ 희망나눔 무료중식 봉사활동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희망나눔 무료중식 봉사활동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15살부터 쌓아 온 수타 실력 = 박 대표는 '봉사왕'이면서도 동시에 '수타 장인'이기도 하다. 남들은 책가방을 메고서 학교를 가던 나이 15살에 중국집 골방으로 들어갔다. 월급은 2만 원, 당시 짜장면 값은 한 그릇에 200원이었다. 중국집에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먹여주고 재워주기 때문이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밑바닥부터 올라왔죠. 아침에는 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서 일일이 다 손질해야 했어요. 찬물을 받아 하루종일 그릇만 닦기도 하고. 그랬더니 주방장이 하나씩 알려 주더라고요. 면 삶는 방법, 칼질하는 거, 해물은 어떻게 다듬는지…."

옛날 중국집은 기계가 없어 모두 손으로 빚은 면을 내놨다. 이제 '수타면'은 보기 드문 풍경이 됐다. 지금까지도 박 대표는 숙성시킨 밀가루 반죽을 판에 치고, 때리고, 늘려서 면을 뽑는다. 수타는 몸이 고된 기술이라 선뜻 배우겠다는 이도 없다.

"어느 날은 팔이 안 올라가서 병원을 갔는데, 어깨 관절이 닳았다고 하더라고요. 뼈주사를 맞고 그나마 나아졌어요. 이제 나이가 육십인데 고민이에요. 수타를 고집하고 싶은데 이 몸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그러네요."

수타는 고민이지만 봉사는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지난해 12월부터는 가게를 옮길 생각으로 문을 잠시 닫았다. 창원시 의창구에 있는 박영수손짜장을 정리하고 3월부터는 진해구에서 새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박 대표는 "코로나19가 어서 빨리 종식돼서 주기적으로라도 봉사를 하고 싶다"며 "하고 나면 몸은 피곤하지만 보람이 있으니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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