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등 7곳 법적 근거 마련
나머지 11곳 조례 제정 요원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10조에 새겨진 말입니다. 국가는 우리에게 인권을 지켜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학력·인종·나이·성별·성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직접 책임지겠다는 거죠.

이 약속이 지역 단위에서 더 잘 지켜지라고 '인권기본조례'가 생겼습니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 인권을 보장해주겠다는 겁니다. 지역 사회가 다각적인 차원에서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한 체계를 만든다는 데 의미가 큽니다. 지방정부는 우리 인권을 잘 지켜주고 있을까요?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맞아 경남 인권기본조례 실태를 파악해봤습니다.

◇도내 인권조례 제정 현황 = 인권기본조례는 지방정부 인권 지수를 보여주는 척도다. 인권기본조례로 인권정책을 실현할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조례가 있어야 관련 조직 신설, 예산 확보 등 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남 기초자치단체 인권기본조례 제정 현황을 보면 인권 보장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창원시·진주시·김해시·사천시·거제시·고성군·함양군까지 7곳의 기초자치단체만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양산시·밀양시·통영시·남해군·산청군·의령군·창녕군·하동군·함안군·합천군·거창군 11곳의 기초자치단체는 인권기본조례가 없다.

경남은 20년 전부터 인권기본조례 논의가 진행됐다. 2009년 양해영(자유한국당) 전 진주시의원이 전국 최초로 '진주시 인권 조례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의원들이 이미 헌법에서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면서 인권기본조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해 무산된 바 있다. 진주시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2년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의 지역화'를 강조하면서 인권기본조례를 권고하자 그제야 제정에 나선 지자체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하지 않은 지자체의 속사정은 무엇일까.

김혜림(더불어민주당·다선거구) 양산시의원은 "인권기본조례 제정이 안 되는 특별한 이유는 따로 없고, 단순히 지방의회 차원에서 진행이 안 된 것"이라며 "아직 지방의회에 인권 의식이 부족한 부분이 있고, 앞으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지난해 10월 의령군수는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 의령군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따르고자 인권기본조례를 제안했으나, 동성애 반대 입장을 가진 보수 기독교 단체의 거센 항의에 부딪혔다. 주민 의견을 받는 과정에서 826건에 달하는 반대가 접수됐다.

모두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제안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경남 곳곳에서는 보수 기독교 단체가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있어서 제정되면 안 된다는 시위가 열리곤 한다.

몽(활동명)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그동안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가 인권기본조례를 인권개악법이라 부르면서 낙인찍고, 여러 지역에서 조례 반대운동을 집요하게 해왔다"며 "일부 지자체는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했다가 보수 기독교 단체 반대로 철회하기도 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역 주민 인권을 보장할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이 방관해서 안 된다"며 "반대 의견이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인권기본조례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건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인권실태조사 이뤄져야 = 인권기본조례 제정을 시도하다 벽에 부딪힌 지자체는 실효성을 문제 삼기도 했다. 조례안 세부 내용을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면 되지만, 임의 조항으로 남겨두는 지자체가 많아서다. 임의 조항이 많을수록 허울뿐인 조례안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한 지자체를 들여다보면 선언적 의미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역 인권 상황을 파악하고 취약 부분을 보완할 정책 및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첫걸음이 인권실태조사다. 그러나 창원시와 사천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자체는 모두 인권기본조례에서 인권실태조사를 임의 조항으로 남겨두거나 아예 명시하지 않았다.

지자체 인권행정 추진 체계도 부실하다. 인권전담부서, 인권보호관, 인권센터가 있는 지자체는 한 곳도 없었다. 인권위원회는 창원시와 거제시 2곳에 그쳤다. 인권기본계획도 마찬가지다. 인권기본계획을 세운 지자체는 거제시 1곳에 불과하며, 창원시는 현재 수립 중이다. 경남 지역에서 지방정부 단위의 인권 보장과 증진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권기본조례가 있더라도 인권위원회 구성이나 인권기본계획 수립이 안 된 지자체가 많다"며 "인권교육도 관련 내용을 넣기만 해놓고 교육했다는 식으로 수치를 만들어 제시하는 지자체도 많은 만큼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시행이 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권고, 관심 둬야 =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런 점을 우려해 2012년 인권기본조례 표준권고안을 만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주민 인권보장 및 증진을 위한 필요 사항과 함께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봤다. 분야별 추진과제, 이행 전략, 재원 조달 방안 등 인권 증진과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인권기본계획 수립을 권고했다.

인권전담부서, 인권보호관, 인권센터 등 지자체 인권행정 추진 체계에도 주목했다. 이들은 지역 내 인권의제를 찾아내고 방해하는 요소를 감시하는 등 인권정책을 뒷받침하고, 시민사회와 행정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하지 않은 지자체도 문제지만, 표준권고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실효성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기본조례 표준안이 2012년에 만들어진 만큼 새로운 변화에 발맞춰 보완하는 노력도 부족한 실정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 인권정책 현황 연구>(2019)를 발표하면서 인권기본조례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기본조례가 사문화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인권영향평가제도 마련과 인권지표 개발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정영선 전북대 동북아법연구소 연구원이 작성한 <지방정부 인권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고찰>(2020)에도 개선 방안이 나와 있다. 정 연구원은 "인권위원회, 인권 담당 부서 기능과 역할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인권기본조례 내용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며 "인권위원회 구성원의 독립성과 개개인 역량, 역할과 기능을 확인해야 한다"고 전했다.

지난 6월 김해시의회가 인권영향평가제도 내용을 보완해 인권기본조례를 일부 개정했다. 우정수 김해시의회 전문위원은 "지자체가 어떤 사업이나 시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어떻게 보호되고 실현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인권영향평가 내용을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