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성 배제 순수한 추상 예술
최소 손길로 자연·인체 형상화
생전 작품세계 방향성 밝혀
"대예술가 개성·독창성이란 건
수련 통한 자각·달관의 경지"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생가

2022년, 창원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 거장 문신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또한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창원시와 창원문화재단은 이에 맞춰 지난 11월 5일부터 21일까지 성산아트홀에서 '창원 조각 거장전'을 열어 문신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창원 출신의 조각 거장들을 재조명한 바 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문신에서 시작했다. 2010년 문신과 문신 예술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을 열었고 이것이 창원조각비엔날레로 확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내년 문신 탄생 100년을 맞는 창원조각비엔날레를 기념해 창원 출신 조각 거장 5인을 집중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흔히 김종영(1915∼1982)을 두고 '불각(不刻)의 미,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나진희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학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과 사물의 질서를 구명하는 것에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을 찾고자 했던 김종영은 최소의 손길로 자연과 인체의 추상화를 추구했다. 그는 주체와 객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인식했으며, 일생을 통해 자연의 순리와 인위적인 예술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선비의 정신으로 순수 추상예술의 품위를 완성했다."

경남도립미술관과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여러 번의 전시를 통해 김종영의 작품을 접해본 이라면 작품의 특성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것도 있고 재료에 손을 댄 듯 안 댄 듯한 애매한 것도 있다. '불각의 미'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1963년도 사진.
▲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1963년도 사진.

◇작가의 생애 = 김종영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 있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이 그의 생가로 잘 알려져 있다. 김종영은 소답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서울, 1936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로 유학하며 조각가의 길로 들어섰다.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가 생길 때 조각 부문 교수로 들어가 1980년 정년퇴임 때까지 후학을 지도하며 한국 조각 예술 교육의 초석을 다졌다.

1953년 3월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라는 국제공모에 '나상'을 출품해 국제조각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입상했다. 이를 계기로 김종영은 추상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한국 최초의 추상조각 작품인 '새'를 출품, 관심을 끌었다.

'새'는 작품의 형상이 새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다듬이를 떠올리게도 한다. 나무에 최소한의 손질만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 역작이라는 평가다.

또 그의 작품명을 보면 '작품 75-4 1975 돌 29.5×9.5×32㎝' '작품 78-19 1978 나무 32×25×56㎝' '작품 80-5 1980 나무 25×8×46㎝'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980년 정년퇴임 기념회고전을 하면서 그때까지의 모든 제목을 지우고 제작연도와 일련번호로 통일했기 때문이다. 초기 작품 제목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 교수인 박갑성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 2015년 9~12월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조각가 김종영과 그 시대'전에 전시된 작품 '새' 1950년대 초 1953년 이전-나무-9x7x55.5cm. /정현수 기자
▲ 2015년 9~12월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조각가 김종영과 그 시대'전에 전시된 작품 '새' 1950년대 초 1953년 이전-나무-9x7x55.5cm. /정현수 기자

◇예술세계 = 김종영은 '형태를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형태를 찾는 작가', 나아가 '형태를 연구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사색과 직관을 통해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고독한 사유가이자 집요한 추궁(追窮)을 통해 그 원리를 이해하고자 한 과학자의 태도까지 겸비한 작가이기도 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는 그의 자화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환갑이 되던 해인 1975년에 그린 자화상에는 '丹靑不知老將至(그림을 그리느라 늙어감도 모르나니) 富貴於我如浮雲(내게 부귀영화는 뜬구름과 같도다)'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이는 청년기에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자신과 투쟁했던 한 예술가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화상은 정신적 여유, 사색의 깊이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그의 높은 정신세계를 훑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 작품 65-5 여인입상 1965 브론즈./정현수 기자
▲ 작품 65-5 여인입상 1965 브론즈./정현수 기자

그가 불각의 미를 실천하는 한 방식으로 재료의 특성을 살려 작업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연 상태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돌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으며 그것을 지나치게 다듬는 행위를 절제했다.

'깎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간의 여백을 살리고 여유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동양의 회화나 서예에서 발견되는 공간미와 상통한다.

▲ 작품 71-4 1971 시멘트, 성벽 돌 88x15x45cm. 3작품 65-5 여인입상 1965 브론즈. 4자각상B 작품 71-5 1971 나무 12x15x25cm. /정현수 기자
▲ 작품 71-4 1971 시멘트, 성벽 돌 88x15x45cm. /정현수 기자

김종영은 자신의 작품이 왜 단순한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 이런 따위의 생각은 갖고 싶지 않다. 기술과 작품의 형식은 예술을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가능한 단순한 것이 좋다.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그가 언급한 '대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도 작가의 삶을 살다 간 그의 여정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싶다. "대예술가의 개성이니 독창성이란 것은 기법의 특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수련과 경험에서 이루어진 자각과 달관의 경지라고 하겠다. 세잔의 예술은 그의 개성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그의 인격과 의미와 성실성에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오히려 그가 터득한 기법은 그의 사후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마침내 큐비즘이 생기게 된 것이다." 

▲ 2018년 10월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김종영 '불각의 미' 전시에 나온 작품 80-5 1980 나무 25x8x46cm. /정현수 기자
▲ 2018년 10월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김종영 '불각의 미' 전시에 나온 작품 80-5 1980 나무 25x8x46cm.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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