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후 학살 희생자 유족
18개 시군 75명 증언 채록·출간
마을주민 처참한 죽음 목격 등
다양한 민간인 피해 사례 담아
진실화해위 실상 파악 기대 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들이 고된 삶 속에 묻어둔 기억들이 증언집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영 없어져 버릴지도 몰랐던 역사의 조각들이다. 증언집에는 진실화해위원회에 미처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못했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유족들은 물론,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언자 이야기도 실렸다. 개별 사건 자체를 넘어, 계속되는 국가 탄압을 감내했던 유족들 삶의 궤적도 살필 수 있다. 이 책은 2기 진실화해위 조사 활동에도 중요하게 활용될 전망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는 '71주기 경남 합동추모제'를 사흘 앞둔 지난달 17일 증언집 <70년 만의 증언>을 출간했다. 경남 도내 18개 시군 곳곳에서 벌어진 다양한 유형의 민간인 희생 사례를 75명의 유족·활동가·목격자가 증언했다. 그동안 이 시기 민간인희생 사건들은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와 개별 연구자들의 저서 등으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역지자체 지원으로 유족 증언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시군별로 정리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 2014년 3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진주지역 민간인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2014년 3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진주지역 민간인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기억은 당사자의 삶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비교적 탄탄히 조직된 창원·진주 유족회는 이전에도 증언집을 출간하는 등 기억 복원 작업을 진행했지만, 나머지 시군은 사정이 달랐다. 유족들 나이가 70~80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민간인 희생사건 정황들은 영영 묻혀버릴 참이었다. 이에 경남유족회가 경남 전체를 아우르는 증언집 출간을 제안했고, 경남도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경남유족회 증언록편찬위원회는 곧바로 증언자 신청을 받았고, 채록 활동을 거쳐 올해 그 결과물이 나왔다.

◇학살 현장 목격자 증언도 = 증언집은 한국전쟁기 국가가 이념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온갖 사례를 담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가 가장 광범위하다. 보도연맹은 국가가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 전향한 사람들을 관리하고자 만든 단체다. 시군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 실제로는 이념과 무관한 민간인이 대거 가입했다. 정부는 한국전쟁 전후, 이들을 계획적으로 집단 학살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사람들은 좌익사범으로 몰려 형무소 수감 중 그대로 죽임을 당했다.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이다. 좌익 반군과 내통했다며 국군이 산청 일대 주민들을 수백 명 단위로 사살한 일, 미군 전투기 총격에 쓰러진 희생자 이야기도 있다.

유족들이라고 해도 한국전쟁 전후 시기 어렸거나, 유복자라서 당시 사건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남은 부모님, 친척 어른들에게서 들은 내용이 증언의 뼈대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시천·삼장 민간인 희생사건'을 직접 목격한 김상수(87·산청) 씨 증언은 의미가 남다르다. 당시 14세였던 김 씨는 1949년 덕산국민학교 졸업식에서 피투성이 군인이 중대장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현장을 봤다. 농민으로 위장한 반군 공격으로 국군 11사단 제3연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이후 김 씨는 마을과 동떨어진 본인의 집에서, 군인들이 마을 사람을 학살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다. 주민들은 직접 판 구덩이에서 총에, 총검에, 죽창에 맞아 죽어갔다. 시천·삼장 사건은 진실규명됐지만, 그의 목격담은 이제껏 알려진 일이 없다.

▲ <70년 만의 증언> 증언채록팀으로 활동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가 증언집 출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 <70년 만의 증언> 증언채록팀으로 활동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가 증언집 출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희생 = 증언집은 무고한 시민들이 민간인 희생자가 된 전말을 증언으로 밝히는 한편, 사건 이후 유족들이 알게 모르게 받았던 박해도 상세히 드러낸다.

노치수 경남유족회장의 작은아버지 고 노현섭 선생은 1960년 4.19혁명 직후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을 주도하고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혁명 검찰부에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결국 병보석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가족들은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김영식(당시 43세) 희생자 역시 마산시민극장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 고 천소악 씨는 일제강점기 학생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일이 있는 유공자였지만, 그 사실을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재판도 없이 죽이는 국가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서다. 성재정(77·밀양) 유족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서, 가까운 친척 집안에서도 '빨갱이 자식'이라며 괄시를 받았다. 공무원 시험을 쳤지만, 매번 신원조회에서 걸려 결국 신문사에 취직했다. 정연조(70·진주) 유족도 진양군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지만, 연좌제에 가로막혔다. 그는 당숙에게서 '너는 공무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니 농사나 지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김정의(80·서울) 유족은 생전 아버지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세상을 등진 뒤, 그는 본격적으로 정의감에 눈을 떴다.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4.19혁명에 참여했고, 마산도립병원에서 김주열 열사 시신도 목격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 기대를 걸었지만, 유족회가 탄압당하고, 인혁당 사건 등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를 비롯한 경남 유족들이 한목소리로 국가에 바라는 일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하나였다.

◇진실화해위 조사·후세대 역사 인식에 활용 = 희생자 유족 중에는 2005년 출범한 1기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람도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많다. 김인규(76·창원시) 유족은 부친이 집 앞에서 기다리던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나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괭이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관련 기록이 없어 진실규명 불능 결정이 났다.

산청 시천면 외공리에서 희생된 204명은 진화위 발굴 조사에도 피해자·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 진실규명 신청이 시작된 사실을 몰랐던 사람도 있다. 할아버지를 잃은 윤혁환(73·함안) 유족은 공직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에야 이런 신청 절차가 있다는 걸 알아 증언자를 확보해놓은 상황이다.

▲ 2013년 7월 천주교 마산교구청 강당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제63주기 6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눈물을 닦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2013년 7월 천주교 마산교구청 강당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제63주기 6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눈물을 닦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증언채록팀으로 활동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는 "진실화해위 조사관들이 진실규명 신청자들을 만나기 전에 증언집을 참고하면, 사건 실상을 미리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진화위 활동을 떠나, 이런 증언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면 세월이 흘러도 역사 연구자들이 1차 사료로 활용할 수 있다. 2세대 유족들도 이전의 아버지 세대의 증언을 읽고, 가족의 역사와 한국 현대사가 겹쳐지는 부분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전무는 "만약 이번에도 진상규명 미신청자들이 많이 남는다면, 신청기간을 연장해서라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라며 "1기 위원회가 권고했던 것처럼, 진화위 활동 기간 후에도 인권재단을 만들어 연구·학술활동 등 후속 작업을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이번 증언집 출간을 놓고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유족들은 길고 긴 금기의 세월을 강요받아 왔다"라며 "고통을 고백하고, 이를 경청하는 과정을 공동체의 기억에 각인하는 일은, 그 자체로 치유와 화해의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구술채록작업은 지방정부와 시민사회 협력의 산물로, 전국적인 모범사례이며, 앞으로 진실화해위가 수행해야 할 증언채록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라며 "증언집은 2기 진실화해위 조사활동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70년 만의 증언>은 도서출판 피플파워 누리집(peoplesbooks.tistory.com)에서 전자문서(PDF) 형태로 누구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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