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삶에 무뎌지는 시간이 올 때
낯설었던 그 첫 설렘을 기억하기를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주책없이 뛰던 심장이 기어이 헛말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오늘 밥은 묵고 나왔소?"

평소 입에 밴 말이 툭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첫 만남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 마음을 흔든 그녀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로 헤어지고 말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넌 말하는 게 꼭 영감 같다." 엉겁결에 나는 또 헛말이 나오고 말았다.

"뭐, 촌에서 나고 살다보니 그리 된 모양이오. 생긴 대로 사는 거 아이것소."

그녀는 나와의 시간 속에서 환한 웃음을 몇 번이고 내 두 눈에 담아 주었다. 빛나는 별 두 개가 제 있을 곳을 잊은 듯,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어찌 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해는 서쪽 하늘로 졌다. 창가에 수놓인 붉은 노을이 헤어짐을 알려주었다. '헤어지기 싫은데. 조금 더 있다가 서로의 집으로 향하자'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셋방에서 보내는 청춘의 시간, 그 사이 찾아온 사랑이란 사치는 또 다른 선물이었다. 일기장을 꺼냈다.

'설렘, 그 떨림과 긴장은 낯섦에서 온다.'

4년이 넘는 연애기간이 지났지만, 삶은 여전히 더디게 나아갔다. 그녀와 결혼을 했다. 변한 거라고는 '따로'의 시간이 '함께'의 시간으로 바뀐 것 외에는 없었다.

"밥 있나? 밥 묵자."

"당신이 밥 좀 해라.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알았다. 설거지도 내가 하끄마."

"우짠 일이고? 뭔 일 있나? 또 사고 쳤나?"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가슴에는 아무런 상처는 없는데, 아팠다. 뜻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 세상사로 어지러웠지만,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싶었지만, 답답한 현실은 답답한 대로 남았다. 그녀와의 시간은 지루할 대로 지루해졌다. 텔레비전을 멍하게 바라보다 스스로 눈이 감기면, 어김없이 다음 날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는 서로에게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봄날, 다시 일기장을 꺼냈다.

'무딤, 그 지루함과 답답함은 익숙함에서 온다.'

"나, 임신한 거 같아."

다시 나에게 설렘, 그 낯섦이 찾아왔다. 앞으로의 시간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떨림과 긴장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적당한 긴장감은 삶에 새로운 힘을 주었다. 익숙함에 젖어갈 때 즈음, 둘째가 태어났다. 또 다른 설렘과 낯섦.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낯섦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낯섦에 익숙해져야 할까. 그 사이 너무도 익숙했던 부모는 늙어 세상을 떠나며, 우리 삶에 또 다른 낯섦을 남겼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게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늘 우리에겐 순간순간의 선택은 설렘과 낯섦을 만들고, 어느새 우리는 그 낯섦에 익숙해가고 만다. 우리는 살아갈만한 삶을 살아간다.

'낯섦의 설렘과 익숙함의 무딤이 인생의 곡선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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