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1967년 국립공원 지정에도
사람 몰려 텐트 치고 밥 짓고 '몸살'
환경부·국립공원공단 복구 시작
무참히 훼손된 세석평전에
비로소 꽃 피고 푸른 숲 이뤄

1967년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 되었다. 개발과 성장이 유일한 가치로 인정되던 시대였다. 1955년에 결성되어 국립공원 지정운동에 앞장섰던 '구례연하반'에게도 국립공원이란 제도는 지리산 자연을 보전함과 동시에 지역개발의 가능성을 높이는 제도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지리산국립공원 지정과 관련한 최초의 보고서 제목이 <지리산 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도벌꾼, 밥 해먹기 좋은 곳 찾는 발길에 '초토화' =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며 보전의 목표가 있었겠지만 국립공원 지정 후에도 지리산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1960년대 전후 지리산은 불법 도벌꾼들이 판쳤다. 도벌꾼들은 낮은 지대는 말할 것 없고, 1500m 이상의 연하천과 칠선계곡 끝자락의 완만한 곳, 그리고 1800m 높이의 제석봉 정상에까지 올라가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 큰 나무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다 팔았다. 도벌꾼들은 군용차의 엔진을 떼어다가 큰 원형 톱날을 걸어 제재소까지 차려놓고 원목을 가공했다고 한다.

법까지 무시하며 대놓고 나무를 베어 가던 시대가 저물자, 중산리로, 백무동으로, 뱀사골로, 화엄사계곡으로 사람들이 올라왔다. 주요 봉우리, 주능선, 평평해 텐트를 치기 좋은 곳, 물이 많아 밥을 해먹기 좋은 곳은 사람들의 발길로 초토화되었고, 나무와 풀이 사라진 곳엔 흙이 드러나고, 흙이 비와 바람에 쓸려가자 그 자리는 돌만이 남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리산국립공원을 동서로 단절하며 1988년 개통된 성삼재 도로로 지리산의 정상으로, 주능선으로 올라왔다. 이 시기, 노고단을 찾은 사람들이 성삼재 도로 개통 전과 비교해 7배나 많아지고, 지리산국립공원 전체 방문자가 2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때 지리산을 종주하던 사람들이 밥 짓기와 야영 장소로 가장 선호했던 곳이 세석평전이다.

세석평전(細石坪田)은 지리산의 주능선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에 펼쳐진 평원으로 '잔돌이 많은 평야'란 의미이다. 세석평전은 대략 1500m 고도에 있는데,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십만 평의 평탄한 땅이다.

세석평전은 지리산 주능선을 산행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고, 5월 말에서 6월 초에 피는 철쭉꽃을 보고자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는 곳이다. 세석평전에 핀 철쭉꽃은 1972년 지리산악회가 발표한 지리10경 '세석철쭉'에 포함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 1981년 세석평전 야영 모습. /<지리산국립공원 50년사>
▲ 1981년 세석평전 야영 모습. /<지리산국립공원 50년사>

세석평전이 거치는 길이든, 목적지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물가에서 밥을 짓고, 평평한 곳이면 어디든지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사람들은 주변 경치가 좋고, 평평하고, 물이 풍부하고, 나무가 많은 세석평전을 좋아했다. 수많은 사람과 텐트로 세석평전의 나무와 풀들은 잘려나갔고, 밥 짓기와 텐트 설치를 위해 땅까지 파헤쳐졌다. 여기에다 국방부는 1991년 벙커와 참호, 철조망 같은 군사시설까지 건설했다.

1980∼1990년대 세석평전의 헐벗은 모습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이용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당시 국립공원 관리 책임자였던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와 공원관리자들이었다. 국립공원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이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협력을 구해야 할 관리자들이 어떤 일도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1990년대 초반 세석평전은 도심의 공사장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절박함에 국립공원 관리를 이관 받은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복원을 위한 복구공사를 시작했다. 1995년의 일이다.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밥 짓기와 야영은 물론 정해진 길이 아닌 곳은 사람들의 출입을 일절 금지했다.

◇사람 출입 금지…되살아난 '세석평전' = 그로부터 27년, 지금 세석평전은 초록을 되찾아가고 있다. 세석대피소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는 세석평전의 모습은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당시와도 다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자연의 속도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

천왕봉, 장터목, 세석평전, 벽소령, 연하천, 임걸령, 노고단, 지리산국립공원 곳곳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 25.5㎞, 약 60리 길을 걷고자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지리산 능선을 걷고 난 후 마음을 정리했다며 정치적 포부를 밝히고, 세상일에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지리산 능선을 걸으며 치유 받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1년에 한번은 지리산을 걸어야 힘을 얻는다고 한다.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면 지리산을 걸으며 힘을 얻는다.

그렇지만 1980년대 세석평전 사진을 보노라면, 무너져 내리는 지리산을 앞에 두고, 그렇게 지리산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왜 멈추지 않았을까, 내가 우리가 멈추지 않으며 지금 모습마저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궁금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세상이 멈춘 시간, 국립공원 대피소를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지리산국립공원에는 266만 9076명(2020년 기준)이 다녀간 것을 보면, 지리산이 국립'공원'인 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2021년 9월, 세석평전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는 길은 투구꽃, 수리취, 쑥부쟁이, 구절초, 미역취, 은분취, 정령엉겅퀴, 까실쑥부쟁이, 용담, 산부추, 참취 등으로 하늘 아래 꽃밭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인 꽃들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리산을 빛나게 한다.

▲ 2021년 가을 세석평전.
▲ 2021년 가을 세석평전.

가을꽃들 주변엔 구상나무가 자라고 있다. 겨울철 이상 고온과 봄 가뭄, 여름 태풍, 집중 호우 등으로 죽어간다는 우리나라 고유종인 구상나무.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자세히 보니 열매가 맺혀있다. 애틋하고 감사하다.

1980∼1990년대 우리가 결단하고 변하지 않았기에, 멈추고 돌아보지 않았기에 세석평전은 무참히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세석평전의 꽃과 나무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무분별한 이용과 개발, 기후위기까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끔찍한 상황을 그냥 맞이할 수밖에 없는 꽃과 나무들, 그리고 반달가슴곰들이 지리산에서 살 수 있도록, 또다시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날들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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