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서 성장한 시인 박재삼
유년시절 가난의 고통과 슬픔
서정적 언어로 치환·승화시켜
여름 가고 가을 오는 골목서
지난한 삶의 노래 떠올라

▲ 박재삼 시인이 시적  감성을 키운 사천시 팔포 바다.
▲ 박재삼 시인이 시적 감성을 키운 사천시 팔포 바다.

'낮에는 쨍쨍한 불볕을 살에 받지만/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도 더러 느끼는' 계절에 아들과 길을 나섰다. 입대를 앞두고 아들은 휴학을 했다. 어느새 청년이 된 아들은 주말에도 종종 부모와 놀아주고 운전까지 해준다. 기특하다. '여름 반 가을 반'인 날에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삼천포로 빠졌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백석, 「삼천포-남행시초4」 중에서

 

시인 백석은 사랑하는 이를 업어오겠다고 큰소리치며 통영엘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갈 때는 창원을 지나 갔지만 돌아가는 길은 삼천포를 지나 진주로 향했다. 사랑하는 이를 업어 오지 못한 백석의 마음은 가난하였으나 삼천포의 거리는 볕이 따사로웠다. 삼천포의 볕이 백석의 가난을 따듯이 위로했을 것이다. 백석이 든 길과 난 길을 차 등짝에 초보 딱지를 붙이고 운전대를 바짝 부여잡은 아들 옆에 앉아 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볕이건만 차창의 안팎이 뜨겁다.

◇수줍음 많은 문학 소년 박재삼 = 백석이 <삼천포>를 쓴 10년 후인 1946년 삼천포의 한 소년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소년은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입학금 낼 돈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 노릇을 하며 삼천포중학 야간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 교사로 있던 시조 시인 김상옥을 만난다. 선생님의 시집을 살 돈이 없어 베껴 쓰면서 소년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가난하여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소년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시인의 길을 가기로 했다. 김상옥 선생은 소년이 기특했을까 애틋했을까. 삼천포의 가난한 소년은 그의 꿈대로 시인 박재삼이 된다.

내 머릿속에서는, 문학 소년은 수줍음을 탄다. 소녀들 앞에서 귓불까지 붉어지는, 별명이 불타는 고구마일 거라는, 언제 각인된 것인지 알 수 없는 편견이 있다. 박재삼은 나의 편견에 딱 어울리는 문학 소년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열 몇 살 때던가

제비꽃 재재거리는

여학교 교문 앞을

발이 떨리던 때는

그런 대로 그 비틀걸음에는

가락이 실려 있었다.

 

삼천포의 골목을 따라 담장 아래로 제비꽃이 줄을 지어 피었다. 제비처럼 재재거리는 소녀들이 소년을 앞질러 간다. 소년은 그 여학생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학교 담장을 따라 줄지은 제비꽃만 보며 걷는다. 여학생들에게서 제비꽃 향기가 났을까. 소년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한다. 발이 떨리다 못해 걸음이 비틀거렸다. 손발이 따로 놀아나는 걸음이 되지 않게 애쓰며 걷다 보니 오히려 가락을 타는 듯했다.

◇어깨로 칼바람 일으키던 시인의 시절 = <울음이 타는 가을강> 시비가 있다 하여 시인이 졸업한 삼천포고등학교에 갔다.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고등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다. 송골송골한 땀이 미끄러지는 게 멀찍이서도 뵌다. 여름 반을 지나 가을 반으로 가는 계절인데 저 아이들의 땀이 여름 반을 붙들고 있는 듯싶다. 저 시절의 아이들이 어디 계절만 붙들까, 세상도 다 우습더랬지.

 

열댓 살 무렵에는

산으로 바다로

들로 언덕으로

어깨로 바람을 일으켜

그 바람 신이 나

칼소리까지 내는 듯하였다니까!

 

누구나 어깨로 칼 소리가 나는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지 않았겠나. 박재삼 시인은 그때를 열댓 살 무렵으로 기억하나 보다. 돌아보는 세월이 그렇더라. 바람을 일으키다가 바람을 따라 다니다가 이젠 바람에 밀리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시인의 말대로 '부끄러움도 가락도 없는/내 발걸음이 섭섭할 뿐'이다.

▲ 삼천포고등학교 시비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  <br /><br /> /이헌수 시민기자
▲ 삼천포고등학교 시비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헌수 시민기자

◇시인의 마음은 골목에서 바다로 = 박재삼문학관을 나와 노산공원을 돌아 물길이 여덜 팔(八) 자를 닮았다는 팔포로 나왔다. 갯벌이었던 곳이 매립되고 축대가 쌓여 지금의 꼴이 되었다. 팔포 가까이에 섬이 있다. 썰물 때면 이 섬까지 바닷길이 열렸더랬다. 팔포로 떠내려 오던 섬이 부지깽이를 든 가시내의 다급한 외침에 멈췄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목섬이다.

팔포로 드는 삼천포천의 다른 이름이 '한내'이다. 박재삼이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겠네.'라고 노래한 강이 한내이다.

한내는 와룡산에서 샘 솟아 팔포로 흐른다. 물길은 길든 짧든 사람을 따라 흘러간다. 사람의 생애는 길든 짧든 울음을 안고 갈 다짐을 자주 하게 한다. 처음과 다음 사이를 굽이돌 때마다 울음이 샘솟듯한다. 꽃이 피어날 때 향기를 토하듯이 삶은 울음을 토한다. 눈물이 더하여 마를 날 없는 한내가 바다에 이르러 울음 소리를 삼킨다. '소리죽은 가을강'은 시인의 바람이었을까, 시인이 도달한 경지였을까.

시인의 바람이었든 시인이 도달한 경지였든 그 시작은 골목이었지 않았을까.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삼천포의 가난한 소년의 꿈이 가난하기 십상인 시인이란다. 진로 지도를 현실적으로 할 것인지 낭만적으로 할 것인지 하는 고민을, 박재삼은 '흥부의 사립문'인 양 가볍게 밀치고, 달빛이 포실한 팔포의 골목을 빠져나와 바다로 갔다. 삼천포 바다에서 '비록 형체는 없더라도 남기게 되는/반짝이는 것, 흔들리는 것은/꽃비늘로 환하게 둘러 쓸 것을' 배웠다.

 

▲ 박재삼 시인의 작품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박재삼문학관.
▲ 박재삼 시인의 작품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박재삼문학관.

◇기특하게 애틋하게 = 시인의 바다를 보러 삼천포에 왔지만 발을 붙든 건 쥐포였다. 삼천포에서 시인만큼 유명한 것은 쥐포이다. 삼천포 쥐치는 재고가 남는 법이 없었다. 쥐치를 쥐포로 가공하는 족족 돈이 되었다. 쥐치를 먼저 받겠다고 싸우다 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였다는 우스갯말이 회자되곤 했다. 요즘은 쥐치 씨가 말랐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란다. 바다를 따라 늘어선 시장을 기웃거린다. 삼천포가 원산지인 것을 확인하고 쥐포를 샀다. 인심 좋은 주인장이 가는 길에 먹으라며 한 움큼 아귀채를 쥐어 주다가 아예 봉지에 담아 준다.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 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시인이 이른 삶의 경지가 가만한 풍경조차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 여겨 본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타인의 눈에 기특하여도 당사자는 애틋하기 십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특하고 애틋해지는 마음이 '소리죽은 가을강'의 마음이지 않을까. 어느새 청년이 된 아들이 운전을 하고 군인이 된다 하니 기특하고 애틋하다. 아들도 자신이 기특하고 애틋했으면 좋겠다. 아들과 함께 박재삼을 따라 삼천포에 빠졌다.

 

본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모두 박재삼의 시이며, 인용한 시는 다음과 같다.

<가난의 골목에서는> <고향 소식> <바다에서 배운 것> <바람이 나를 따라> <열 몇 살 때>

<여름 반 가을 반>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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