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축조 추정 봉토분 13기 경운산과 이어진 야산에 분포
지역 최대 규모 고총고분 확인 당시 독자 지배세력 존재 가늠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민간 소유 토지라 관리 한계

현재 대가야는 경북 고령으로 통하지만, 원래 가야에는 2개의 '대가야'가 있었다. 1~4세기 전기에는 김해 가락국이 '큰 가야'였고, 5~6세기 후기에는 고령 대가야가 '큰 가야'였다.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가락국기를 보면 수로왕이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명명했다고 나와 있다. 가야에 속한 나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가락국이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국명이다.

김해지역에 가야 관련 문화유산이 즐비한 것은 가야 거대 세력이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 가야유적이 대성동고분군과 양동리고분군이다. 기원후 1세기부터 400년 고구려 남진까지 금관가야 지배계층이 조성한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해 김해지역에는 양동리고분군·예안리고분군 등 수많은 고분이 분포한다. 이들 유적 규모만 보더라도 거대 세력이 김해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김해에는 후기 금관가야 때 주축을 이루던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3년 전 경남도 지정문화재(경남도 기념물 제290호)로 지정된 원지리고분군은 금관가야가 무너지기 전 관련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위에서 내려다본 원지리고분군 전경.   /김해시
▲ 위에서 내려다본 원지리고분군 전경. /김해시

이 유적은 대성동고분군·양동리고분과는 5~6㎞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경운산으로 이어지는 야산에 조성된 감나무밭 맞은편 산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중대형 고분이 여럿 나타난다. 현재까지 김해지역에서 확인된 고총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 봉분이 이곳에 있다. 이를 보려면 길이 나 있지 않은 숲속 안쪽으로 가야 한다. 사방에 퍼져있는 170㎝ 이상 높이 잡초와 잡목을 손으로 비집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해발 30~50m까지 5분가량 산을 타야 고분군이 나온다.

9일 오후 3시께 찾은 원지리고분군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잡목에 뒤덮인 채 방치되고 있었다. 감나무 과수원과 민묘로 이어지는 길목을 제외하고 유적으로 가는 길은 따로 나 있지 않았다. 임도에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토기편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유적 일대에는 현대식 민묘가 조성돼 있었으며,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맞은편에는 감나무 밭이 일궈진 상태였다. 고분군을 나타내는 안내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세워진 컨테이너에 문화재 유존 구역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가 유일했다.

▲ 김해 원지리고분군 3호분.   /최석환 기자
▲ 김해 원지리고분군 3호분. /최석환 기자

김해시 가야사복원과 여창현·강주성 학예연구사와 함께 수풀을 헤집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 학예사는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원지리고분군 일대 토지가 민간 소유여서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풀로 뒤덮인 고분군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대성동고분군·양동리고분군은 3~4세기 크게 융성했던 세력에 의해 조성된 곳이에요. 지금까지 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 세력 말고도 또 다른 세력이 김해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고 있어요. 김해지역에서 고총이 안 보여서 다른 세력이 없는 줄 알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된 거예요. 금관가야 집단의 마지막 세력이자 대성동·양동리 이후 가장 큰 세력이 이곳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대성동과 양동리에 있던 세력이 쇠퇴한 뒤에 남은 세력이 원지리 쪽으로 넘어오거나, 새로운 세력이 원지리에 와서 세를 구축했던 것으로 추정돼요. 이 정도 규모 고총고분은 김해에서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서 역사적 가치가 큰 거죠."

▲ 원지리고분군 M4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김해시
▲ 원지리고분군 M4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김해시

원지리고분군은 1977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처음 확인된 유적이다. 축조 시기는 6세기로 추정된다. 1984년 부산대박물관 지표조사, 1992~1993년 동아대박물관 금관가야권 지표조사, 2004년 대성동고분박물관 지표조사, 2017년 경상문화재연구원 긴급발굴조사, 2018~2019년 가야문물연구원 정밀 발굴조사, 2019년 가야역사문화연구원 정밀지표조사 등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횡구식석실분(돌방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M3호분은 6세기 횡구식석실분으로서 현존하는 금관가야 후기 고분군 중 최대 규모 고총고분이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가 충분하지 않아 정확한 성격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이 고분군은 금관가야 쇠퇴기에 해당하는 400년 시기를 규명해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는 판단도 받았다. 긴급 발굴 조사 결과 이후 김해시는 유적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원지리고분군 1만 35㎡ 일대를 경남도 기념물 제290호로 지정 고시했다.

유적에서 확인된 봉토분은 13기다. 2019년 1월 가야문물연구원이 발굴 조사할 때까지는 12기로 보고됐으나,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1기가 추가 확인됐다. 대형 봉토분은 M3호분 1기뿐이다. 나머지는 중형분 5기, 소형분 7기다. M3호분은 장축직경 21.6m, 단축 18.8m, 높이 4m 규모다. 매장주체부 내부 규모는 길이 730㎝, 바닥너비 약 145㎝, 높이 157㎝이며, 봉토 정상부 고도는 해발 39.1m다. 지배계층 중 수장급이 묻힌 무덤으로 추정된다.

▲ 원지리고분군 M3호분 석실 내부.  /김해시
▲ 원지리고분군 M3호분 석실 내부. /김해시

2017년 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3호분은 상당 부분 도굴된 상태였다. 대부분 파괴돼 원위치를 알 수 없었으며, 고분 주변은 현대묘와 경작지 조성, 임도 개성 등으로 훼손돼 있었다. 이 유적에서는 단각고배(짧은 굽다리접시), 연질통형기대(원통모양그릇받침), 발형기대(화로 모양 토기) 등 토기류 19점, 철기류 90점, 환옥(공 모양의 옥) 19점이 출토됐다. 유개고배(굽다리접시), 자라병(자라 모양 병) 등 소형 토기와 유리구슬 등도 유적에서 일부 출토됐다.

여 학예사는 원지리고분군에서 발견된 횡구식석곽 역시 가야지역 내에서 유사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밝혔다. 사적이 아닌 기념물로 지정된 이유에 관해서는 추가 조사를 거쳐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면 추후 사적으로 지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 김해 원지리고분군으로 가는 임도에서 발견한 토기편.  /최석환 기자
▲ 김해 원지리고분군으로 가는 임도에서 발견한 토기편. /최석환 기자

여 학예사는 "좁은 석곽식 묘제와 신라식 묘제가 결합돼 독특한 형태가 원지리고분군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내부 공간이 좁으면서 횡구식으로 돼 있고 길까지 나 있는 형태인데, 이러한 것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관과 내부 형태, 규모면을 다 따져볼 때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금관가야 마지막 쇠퇴기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 원지리고분군"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분군 가치 규명도 중요하지만 제반적인 것도 중요하다"며 "선제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고 조사도 충분히 진행해 성격을 규명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2기만 발굴조사가 돼 전체적인 양상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중소형 중에서도 가치가 큰 유적인 만큼 추가 조사를 해 성격이 명확해지면 추후 사적 신청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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