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황토·돌 등 자재로 활용
해·비 고려해 처마 각도 고안
못·꺾쇠 없이 짜맞춰서 건축
너른 앞마당은 소통의 장 역할

비가 오는 날, 기와를 타고 내려온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줄기를 이루며 흐른다. 멍하니 쳐다보다가 빗줄기를 손으로 가로막아 본다. 손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은구슬 같다. 손등으로도 맞아본다. 살짝 묵직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손을 빼면, 빗줄기는 기단 아래 마당으로 떨어지며 홈을 판다. 이 모습,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본 듯한 장면 같다.

지난주 비가 내리던 날 김해 한옥체험관을 찾았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한산했다.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옛 기억이 하나둘 소환된다. 50년 전, 호랑이가 먹잇감 구하러 내려왔다가 '곶감' 소리에 깜짝 놀라 내뺄 법한 그런 초가집에 살았을 때다.

그날도 비가 종일 내렸다. 기껏해야 툇마루보다 2~3배밖에 크지 않은 대청마루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어디 갔다 왔는지 비 맞은 삽살개 해피가 새로 산 내 운동화를 물고 논다. 그걸 빼앗으려고 벌떡 일어나 마루를 내려서는데, 이놈이 운동화를 물고 대청마루 아래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빨리 나오라고, 달래도 안 되고 을러도 안 되고, 댓돌에 앉아 엉엉 울고 말았더니 그때야 슬그머니 옆에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

도시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이제 그런 추억마저 특정한 계기가 없으면 끄집어내기 쉽지 않다.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아파트에 살고는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햇살이 곱게 드는 날 모래흙 뿌려진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꿈이 늘 켜져 있기도 하다. 한옥,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다.

▲ 한옥에 들어서면 마당을 가장 먼저 만난다. 전통적으로 마당은 그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소통하고 여유를 찾는 공간이었다. 사진은 김해 한옥체험관 전경. /정현수 기자
▲ 한옥에 들어서면 마당을 가장 먼저 만난다. 전통적으로 마당은 그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소통하고 여유를 찾는 공간이었다. 사진은 김해 한옥체험관 전경. /정현수 기자

◇한옥은 어떤 장점이 있을까 = 일단 나무, 흙, 돌 등 유해 화학물질이 없는 자연 재료로 만들어지므로 피부질환을 일으키지 않고 쾌적하다.

황토벽은 습기와 열을 자연스레 조절해주고 기단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준다.

"집은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다.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만 완전한 집이다. 현대 가옥은 편안하게 앉아 밖을 내다보기에는 창턱이 너무 높아 밖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적다. 반면 턱이 전혀 없는 아파트는 실내의 사생활까지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결점이 있다."(한옥의 멋, 한문화사)

◇보와 도리로 떠받친 천장 = 한옥이 갖는 특징 중에서 현대 가옥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집안의 천장이 아닐까 싶다. 한옥은 지을 때 전후좌우 방향으로 보와 도리 부재를 먼저 올린다. 앞뒤로 걸치는 것을 보라고 하고, 좌우로 걸치는 것은 도리다. 보는 지붕 무게를 받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가장 중심에 놓이고 가장 큰 것이 대들보다.

도리는 서까래 바로 아래 길게 놓이는 나무인데 놓이는 위치에 따라 기둥 바로 위에 놓이는 주심도리, 주심도리 안팎에 놓이는 내목도리와 외목도리, 종도리와 주심도리 사이에 놓이는 중도리도 있다. 도리 모양이 둥근 것은 굴도리, 네모난 것은 납도리라고 부른다.

▲ 천장을 떠받치는 보와 도리.  /정현수 기자
▲ 천장을 떠받치는 보와 도리. /정현수 기자
▲ 해가 뜨고 지는 각도를 고려해 만든 처마. 비 때문에 목재가 상하는 것도 막는다. /정현수 기자
▲ 해가 뜨고 지는 각도를 고려해 만든 처마. 비 때문에 목재가 상하는 것도 막는다. /정현수 기자

◇처마 길이와 기울기는 과학이다 = 한옥에서 여름과 겨울 햇빛을 적절히 대비하고 비 때문에 목재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한 것이 처마다. 처마가 길면 그림자가 깊어지는데, 이때 마당에 깔린 하얀 모래흙이 빛을 반사해 처마 안쪽을 골고루 비춘다. 그래서 처마와 마당은 한 쌍을 이룬다고도 하겠다.

처마 각도는 해가 떠오르고 지는 각도를 고려한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지점을 남중고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하지에 76도, 동지에 29도 남중고도를 보인다. 여름에는 낮 길이가 14시간 45분, 겨울에는 9시간 35분으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처마는 겨울 햇빛이 아침 10시쯤 대청 끄트머리에 닿게 하고 오후 4시 안쪽 끝에 닿게 했다.

◇한옥은 조립주택이다 = 한옥 특징 중 또 하나는 조립식 구조라는 점이다. 나무로 만든 구조재와 부재들은 못이나 꺾쇠를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는 기법을 쓴다. 그래서 지진에도 강한 저항력을 보인다. 수평 수직으로 짜 맞춘 목재가 서로 떠받치고 있어 나무가 휘거나 변형되면서 지진의 힘을 흡수하는 원리다.

그리고 미리 치수에 맞춰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깎아내고 끌로 구멍을 파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실제 집짓기에 들어가면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수원화성도 공사기간 2년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 마당 쪽으로 내어 높이 띄워 만든 누마루.  /정현수 기자
▲ 마당 쪽으로 내어 높이 띄워 만든 누마루. /정현수 기자

◇누마루는 무슨 용도로 만들었을까 = 누마루란 마당 쪽으로 내어 높이 띄워 만든 마루다. 대개 중층건물에 마루를 깔아 구성하는데 조선 후기부터는 사랑채에 누각을 붙여 여기에서 시서화를 즐기거나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옥체험관에는 사랑채뿐만 아니라 안채에도 별채에도 누마루를 붙였다. 이곳 누마루는 향교나 서원에서 흔히 보는 것과는 높이에 차이가 있다. 누마루라는 말은 2층 건물을 뜻하는 '루(樓)'와 마루가 합쳐 만들어진 것이다.

◇안과 밖 중간지대이자 화합 공간 마당 = 한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공간이 마당이다. 전통적으로 마당은 우리네 삶에 큰 역할을 했다. 마당은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동양화 여백처럼 소통하고 여유를 찾는 공간이다. 또한 과거에는 신분을 넘어선 소통 공간이기도 했다.

잔치나 장례가 치러지는 공식 장소요, 농경문화에서는 노동 공간이요, 가을 추수 후에는 한바탕 풍물이 펼쳐지는 축제 공간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마당에는 나무와 화초를 심지 않았다. 지붕을 넘는 나무는 밖에 심었다. 집이 동남향이라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이곳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비워놓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한옥을 통해 건축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많다. 아파트에는 없는 문지방에서부터 대청마루 아래에 놓인 디딤돌, 그리고 기단을 쌓은 이유, 담의 역할이 전혀 없는 헛담은 왜 만들었는지, 편액과 주련은 왜 다는지 등. 한옥에서 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전통가옥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찾아본다면 마음이 한결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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