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강국다운 즉석 인증서 발급기
다른 관광지에도 고객지향적 행정을

초여름 3주 제주에 머물렀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길어야 나흘 정도였으니 늘 이름난 곳만 바삐 다녔다. 이번에는 제주 본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육지와는 달리 평지에도 울창한 숲이 많고 접근하기 편해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걸 처음 실감했다. 대표적인 곳이 곶자왈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여러 번 갔다. 그런데 첫날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반바지에 샌들을 신었는데 안전상 이유로 샌들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뙤약볕에 왕복 3㎞를 걸어 운동화로 바꾸어 신고서야 통과했다. 햇볕도 들지 못하는 울창한 숲을 휘감아 도는 바람, 제주 남서쪽 풍광이 한눈에 드는 전망대 그리고 4.3항쟁 흔적까지. 3㎞의 노고는 날아갔고 잘 정비된 곳이라 발을 완전히 감싸는 신발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사흘 뒤 이른 아침에 찾아갔더니 적지 않은 인근 주민들이 상쾌한 숲 내음과 새소리로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신 후 한 잔의 커피로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 손을 잡은 노란 머리 외국인이 투덜거리며 전화를 하고 있다. 엿들으니 3일 전 내가 겪었던 그 문제를 부인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 거니 꼭 들어가고 싶다면 카페 주인 신발을 빌려보라 거들었지만 이미 상당히 불쾌해진 그는 앞은 막히고 뒤로 고정할 수 있는 샌들을 들어 휘저어 보이고는 거친 타이어 마찰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가 떠난 후 실랑이를 벌이던 공원 직원에게 홈페이지에 이 내용을 눈에 띄게 표시하고 빌려줄 신발을 준비하면 어떠냐고 주제넘은 조언을 했더니, '몇 켤레나 준비하면 되겠느냐'로 시작해 '관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빌려준 신발로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말에 숨이 턱 막히고 현기증마저 일었다. 수탁운영 단체 소속이라 결정권이 없다기에 담당 공무원에게 건의해 보라는 하나마나 한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섰다.

같은 기간 절친과 한라산을 올랐다. 성판악에서 시작해 백록담에 도착하니 볕을 피할 공간은 한 뼘도 없는 민둥산 꼭대기에서 제대로 된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해 긴 줄에 끼었는데 확성기는 연신 이 사람 저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가며 간격을 유지하라고 성화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어쩌고 하는 내용도 얼핏 들었지만 또 코로나 이야기겠지 하고 귓전으로 흘렸다.

세 번째 한라산이지만 하산은 늘 관음사 쪽이다. 성판악 쪽보다 경사는 급하지만, 경관이 낫다. 북벽을 타고 넘는 구름, 탐라계곡 그리고 지구 중심으로 향한 구린굴. 열 시간 만에 도착한 안내소 근처 현금인출기만 한 기계 앞에 여남은 명이 줄을 서 있고 어린 딸과 아버지는 마치 표창장을 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온다. 한라산 등정 인증서 발급기! 저런 게 다 있구나. 대열에 동참해 기계 앞에 도달하니 등록번호를 넣으라는데 탐방 예약 번호인가 해 전화기를 뒤져도 열 자릿수는 없다. 머뭇거리고 있으니 뒤에 선 아가씨가 다가와 정상에서 전송한 사진을 보잔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국립공원 관리소로 발급 비용(1000원)과 함께 보내고 받은 접수번호를 입력하면 그 사진을 이용한 등정 인증서가 발급된단다. 아, 사진 전송 어쩌고 하던 그 방송! 시간만 끌다 맨손으로 돌아서니 뒷사람들 눈총이 따갑다.

모든 시작의 끝이 창대할 수는 없지만, 시작이 없으면 창대한 끝은 절대 없다. 디지털 강국의 장점을 십분 살린 등정 인증서를 추진한 자세로 곶자왈 신발 문제를 바라보면 훌륭한 해법이 나오지 싶다. 고객지향적 행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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