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로 막으려는 권력에 함께 맞섰던 시민
지금은 규제의 위험 증명하라는 요구 커

권력자는 굳이 탄압이나 통제 욕구를 세련되지 않게 드러내지 않아도 됐다. 미간만 조금 찌푸려도 주변에서는 알아서 기었다. 능력 있는 심복은 그럴 때 더욱 돋보였을 테다. 보도를 지시하고 검열하며 통제하는 것은 국가정보기관 주요 업무였다.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촛대뼈? 쪼인트? 어쨌든 일 처리가 시원찮았던 지상파 방송사 사장이 청와대에 불려가서 까였다는 부위인데, 정강이 근처쯤 되겠다. 별 관련 없겠지만 우연히도 그 방송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연에 우연이 또 겹쳤겠지만 이른바 '개념 발언' 유명인도 지상파에서 점차 보기 어려워진다. 한 대 까버리면 그만이지 귀찮게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다.

이미 고인이 된 청와대 민정수석은 비망록에 함께 일한 비서실장이 내린 엄중한 지시를 기록해뒀다. 아주 인상적이다.

"비판 언론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주라."

2014년 국무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한 게 불쾌했던 비서실장은 시건방진 언론부터 흘겨봤다. 국무총리 인사를 비판한 언론을 겨냥해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고발, 손해배상청구 등 철저한 대응을 주문했다고 한다. 밟아버릴 방법이 허다한데 시끄럽게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꽤 지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이 권력과 궤를 같이하는 정당이 최근 '언론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느닷없고 뜬금없다. 오롯이 저널리즘을 위한 게 아닐 테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괜찮다.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중재법'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법안 추진 배경은 이해하지만 규제로 저널리즘 공공성을 성취한 사례는 안타깝게도 없다. 규제로 따지면 지난해 방송 자격을 잃었어야 할 한 종합편성채널은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규제 적용이 언론판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섣부른 규제는 미약한 저널리즘을 규제 안에서 끙끙거리게 할 것이다. 반면 포악한 매체는 규제 밖에서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선의를 앞세운 규제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비극은 동의하지 않는 규제를 반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과거 권력이 규제 없이 저질렀던 패악질 앞에서도 언론은 외롭지 않았다. 최근 10년만 훑어봐도 언론계가 자랑하는 의미 있는 투쟁 곁에는 늘 시민이 서 있었다. 시민은 권력이 언로를 막으려 할 때마다 어떻게든 기발하게 맞섰다. 저널리즘에 충실한 매체와 기자에게 선뜻 어깨를 빌려주곤 했다. 지금 당장 문제는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외롭다는 데 있다. 시민은 지금 규제가 저널리즘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언론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어느 정도 손해와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구호 말고 보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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