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학살 자행한 국가 범죄, 남은 가족 힘겹게 생계 이어가
"진실규명자 보상법 만들고 아픈 역사 교과서에 실어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은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해방을 맞았지만, 다시 한국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억울하게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근 하동·고성·남해·사천국민보도연맹 사건(47건)의 조사 개시를 지난달 22일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앞서 진주보도연맹 사건 61건, 창원보도연맹 사건 29건에 대한 조사도 개시했다.

지난 9일 사천보도연맹 사건 유족 윤순임(77) 씨를 사천시 정동면 자택에서, 주옥희(74) 씨를 진주시 본성동 한 사무실에서 각각 만났다.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신청했던 두 사람은 최근 조사 개시 결정 통지를 받았다. 주 씨와 함께 만난 정연조(71)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을 통해 희생자, 피해자, 유족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 윤순임 씨. /김구연 기자

◇갑자기 끌려간 아버지 = 아이는 노인이 됐다. 사건은 71년이나 흘렀다.

윤 씨는 "내가 7살 때 아버지가 그리됐다. 아버지는 그때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어머니 말로는 누워 자는 사람을 데꼬(데려)갔다 하더라. '왜 끌고 갔느냐'고 물으니까 알 수가 있느냐고 했었다. '아무개'가 나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피하고 아버지가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해결하고 오겠다고 가셨다고 했는데,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 씨 목소리는 메었다.

주 씨도 사정이 비슷하다. 주 씨는 "아버지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군대를 대리로 갔다고 들었다. 복무 중에 부대가 폭격돼서 집에 돌아오셔서 지냈는데, 아버지가 머슴하고 논을 매고 있는데 누가 불러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에 큰어머니가 가마니짜기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면 직원이 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서 항의한 적이 있는데, 그 일로 부른다고 해서 갔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교육을 받은 분이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윤 씨는 "아버지가 좀 배안(배운) 거 같더라. 그 당시엔 가스나(여성)가 배아서(배워서) 뭐하나 했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머리가 지다난(기다란) 언니들을 회관에 모아서 가르쳤다. 낼로(나를) 좋다고 옆에 앉히고 공부 가르쳐주고 했다"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주 씨도 "어렸을 때 내내 아버지가 군대에 있어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고등학교 정도까지 다니신 걸로 안다"고 했다.

◇죽임 이후 가족은 고통의 연속 = 윤 씨의 아버지는 사천시 용현면 석계 야산 개울에서, 주 씨의 아버지는 사천시 곤명면 성방리에서 끌려가 총에 맞아 숨졌다. 두 곳 모두 보도연맹 집단학살지다.

윤 씨는 어머니, 여동생 2명과 살았는데 고모부가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 형제가 딸 서이(셋)에 아버지가 막내라. 막내 외동아들. 돌아가셔도 마음대로 시신을 찾아오지도 못하고, 부락에 고모부가 계셔서 지게를 짊어지고 찾아왔다고 들었다. 시체 무더기에서 아버지 금니를 보고 찾았다고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신을 바로 찾아오지도 못해서 동네 어귀 밭둑에 모셔놨는데, 할머니는 외동아들 죽음에 밭둑을 파면서 울부짖었다고 했다.

주 씨도 "아버지 시신을 바로 찾지 못했다. 시체 무더기에서 얼굴 형체도 없어진 아버지를 머슴이 속옷 매듭을 보고 겨우 찾아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으셔서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너거 아버지는 억울하게 세상 떠났다. 아무 죄도 없이 불려가서 바로 총살 당했다"며 되뇌었다고 했다.

희생자들의 남은 가족들에게는 생계라는 삶의 고통이 더해졌다. 어머니들은 생계 전선에 나섰고, 아이들은 그만큼 빨리 성숙해져야 했다.

윤 씨 어머니는 사남 우천에서 새벽에 일어나 삼천포로 가서 생선을 받아 집집이 다니며 팔았다. '도부 장사(도붓장수)'였다. 편도 두 시간 이상 거리를 걸어서 오가면서 머리에 생선을 이고 팔았다.

주 씨 어머니도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그릇 등 잡화를 파는 '도부 장사'를 했고, 강변 공사판에서 자갈을 손으로 골라내는 품팔이도 했었다.

◇"억울한 죽음 풀고 싶다" = 이들에게 왜 1기 때 진상 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윤 씨는 "1기 위원회 때는 몰라서 신청을 못했다. 신청하러 가니까 접수가 끝났다고 하더라. 이번에는 유족회를 통해서 신청하는 것을 알게 돼서 했다. 지역 유족회 모임에 꾸준히 참석해 왔다"고 했다.

주 씨는 "1차 때 증인을 못 찾아서 시기를 놓쳤다. 2차 때는 당시 집안일을 도와주셨던 분을 찾았다. 그래서 증인을 찾아서 신청을 했고, 이번에 조사개시 결정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71년이 지난 사건은 여전히 종결되지 않고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진실 규명이다.

윤 씨는 "내가 이거를 지금 신청해가꼬. 우리 아버지 혜택을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이게 오늘 조사한다고 내일 모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억울해서 신청을 한 거다. 진실이 어디 잘 밝혀지겠나. 그래도 진실이 밝혀지고, 억울한 것도 풀렸으면 한다"고 밝혔다.

주 씨는 정부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돌아가신 분들, 전부 다 정말 죄 없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아입니까. 이분들 명예도 바로잡아주시고.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습니꺼. 택도 아닌 연좌제에 묶어서 평생 기 한번 못 펴고 산 사람이 많다 아입니까. 다 70이 넘었는데,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꺼. 하루빨리 억울하게 죽은 자, 희생자 명예도 회복해주고, 보상도 빨리해줘야 합니다. 정부에서 내내 미적미적하다가 다 마무리 안 하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주옥희 씨. /김구연 기자

◇"보상법 만들어 국가가 책임져야" = 이날 주 씨와 함께 자리했던 정연조 회장은 더 많은 희생자 가족들이 진실 규명 작업 신청을 하고, 이들에 대한 보상법도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정 회장은 "주변에 보면 피해를 입었어도 신청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몰라서 그런 분들도 있지만, 죽음을 증명할 길이 어려워서 그런 분도 많다. 보도연맹으로 잡혀간 미성년자도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큰아버지, 삼촌 호적에 간 사람도 있어서 증명하는 것이 어려운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1기 진실화해위에 신청해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해 보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국가가 총살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명예회복을 시켜주고, 보상을 해야 한다. 지금은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문을 가지고 법원에 개인이 소송을 제기해서 보상을 받는 실정이다. 그러면 짧게는 4년, 길면 6년이 걸렸다. 그렇게 할 게 아니라 보상법을 발의해서 진실규명이 된 사람은 보상을 바로 받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도연맹 사건에 국가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픈 역사를 교과서에도 넣어야 한다. 젊은 학생들이 전쟁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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