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전문용어 공적영역 장악
트립풀·아이디어톤 '아리송'
성과 높이려는 상업광고식 이름짓기
쉬운 이해가 먼저인 공공기관 언어

최근 경남지역 한 관광지 이름이 '디피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디피랑이 뭘까요? 일부러 찾아보기 전에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지방자치단체 표어는 그나마 낫습니다. 관광·행사·축제·사업 이름을 외래어·외국어, 그리고 우리말과 합성어로 짓는 사례는 훨씬 더 많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지난해 10월 통영시는 낮에는 붐비지만 밤에는 한적한 관광 명소 부흥을 위해 '디피랑'을 조성했다. 디피랑은 남망산공원에 만든 '빛의 정원'이다.

피랑은 '벼랑'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통영에는 동쪽의 가파른 언덕 동피랑이 유명하다. 박경리 선생의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 배경인 서피랑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통영시는 피랑에다 '디'를 붙였다. 디피랑은 '디지털'과 '피랑'을 합성한 것이다.

디피랑은 통영시가 낮보다 밤에는 비교적으로 한적한 관광 분위기 때문에 '밤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고자 한 결과물이다. 빛과 인공조명을 활용해 15개 산책로를 조성했다.

▲ 통영시가 남망산공원에 조성한 빛의 정원 '디피랑'. 디피랑은 '디지털'과 '피랑'을 합성한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DB
▲ 통영시가 남망산공원에 조성한 빛의 정원 '디피랑'. 디피랑은 '디지털'과 '피랑'을 합성한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DB

◇뜻 모를 신조어 = 사전에 나오는 뜻으로 보면 디지털을 갖다 붙인 것부터 애매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디지털을 '정보·통신'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여러 자료를 유한한 자릿수의 숫자로 나타내는 식'이라고 해석한다.

디지털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순화하면 '전자' 정도다. 국립국어원이 디지털 도어록을 '전자 잠금장치'로 다듬은 게 예다. 그렇다면, 디지털 피랑은 숫자식 피랑, 전자 피랑 정도가 된다.

무슨 뜻일까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디피랑이라는 이름보다 '밤피랑'으로 지었으면 어땠을까.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디지털피랑이라는 단어는 통영시 입장에서는 기발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 지금은 한국의 멋이나 맛 등 고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게 외국인에게도 호응을 얻는 시대가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밤피랑이라고 지었으면 훨씬 멋있기도 하고, 해가 지고 나서도 관광을 유도하겠다는 연속성도 충분히 이끌어 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일반적으로 공무원의 외래어 남용이 지나치다. 사적인 언어생활을 공적 영역까지 무의식적으로 끌어들여서 그런 것"이라며 "업무 성과를 높이려다 보니 자꾸 상업 광고처럼 튀어 보이려는 식으로 이름을 짓는데, 공적 영역에서 언어 사용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대로 전달하고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영 주민 처지에서는 큰 거부감이 없지만, 외지인에게 뜻이 전달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민애(42·통영 도남동) 씨는 "동피랑과 서피랑이 워낙 유명하고 익숙해 디피랑을 들었을 때 주민으로서 대략 이해는 됐지만, 외부인에게 밤에 개장하는 공원이라는 의미가 전달될지는 의문"이라며 "디피랑 대신 더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통영시는 디피랑이 조성 업체로부터 제안을 받았고 시민 공모, 학생·예술인 등 민간 심사를 거쳐 선정된 명칭이라고 밝혔다. 공모·심사 과정에서 밤피랑, 빛피랑, 남피랑, 꿈피랑, 남망산 미리내공원, 남망 빛의 언덕 등도 후보에 있었다.

통영시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참신한 명칭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반영돼 최종적으로 디피랑으로 선정됐다"며 "디피랑 단어를 낯설어하는 면이 있어서 홍보할 때 동피랑과 서피랑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래어·전문용어 남용 = 지자체가 눈길을 끌고자 관광·행사·사업 등 명칭에 외래어를 사용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거제시는 지난달 첫 여행 종합 책자 <트립풀 거제>를 출간했다. 여행(trip)과 가득한(-ful) 합성어인 이 말은 '여행거리가 가득한 거제'라는 뜻이겠다. 의미를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조합이지만 우리말로는 톡톡 튀는 이름을 지을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트립풀 남해'도 있다.

경남도는 거제 청년마을 '아웃도어 아일랜드' 2기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 앞서 같은 사업을 추진한 부산 초량 '이바구캠프', 부산 영도 봉래2동 '우리가사랑방'과 비교하면, 영어로만 조합한 이름이 어색하고 취지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외래어를 포함해 전문용어를 그대로 쓰는 사례도 흔하다. 경남관광지원센터가 진행하는 '경남관광 창업 아이디어톤'에서 '아이디어톤'은 생각(idea)과 마라톤을 합친 말이다. 오랜 시간 어떤 주제나 사업 모델을 두고 창의적인 생각을 고안해 발표하는 회의 성격을 띤 경연 대회를 말한다. 이그나이트, 콘퍼런스, 심포지엄 등도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의미와 차이를 알기 어렵다.

학교에서 '스팀데이', '스팀동아리', '스팀수업' 등으로 쓰이는 스팀(STEAM)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인문·예술(Arts), 수학(Mathematics) 머리글자를 합해 만든 용어다. 디자인 싱킹, 비즈쿨(Business+School), 그린스마트, 데이터 리터러시, 쿨루프(cool roof), 메이커 스페이스 등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런 단어는 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도 곤란한 말이다.

반면 순우리말로 만들어 호기심을 이끌어 내거나 재미있는 사례도 있다. 창원시는 주요 관광지 정보를 가상·증강 현실로 볼 수 있는 앱 '나온나'를 운영 중이다. 나온나는 '밖으로 나와라', '지도가 나오다', '재미있는 요소가 나온다' 등 뜻을 담고 있다.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용어와 사업 명칭 등을 개선하는 요구는 잇따르고 있다. 지난 6월 하성자(더불어민주당·가 선거구) 김해시의원은 제237회 김해시의회 제1차 정례회 제1차 본회의 5분 자유 발언에서 "김해시가 지원하는 사업 명칭 중 영어나 외국어를 통째로 쓰거나 혼용된 경우가 증가했다"며 "2021년 예산서에 특히 영어 제목이 증가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또 하 의원은 "행정 용어 일제 잔재 청산 운동이 추진된 지 꽤 지났지만 생활 속에서 그런 용어들이 아직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도 말했다.

행정 용어 속 일제 잔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까? 조례를 찾아보면 넘친다.

 

※ 감수 김정대 경남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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