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로 만기복역 구연철
사형선고 후 복역 중 전향 김정수

"와~! 안 죽고 살아있으니 이리 보는구나!"

"이게 얼마 만이고. 근 70년 돼가네?"

"그렇지. 70년이다. 얼굴 보니 피부가 팽팽한 게 나보다 훨씬 젊어보인다. 고생은 안하고 사는가보네?"

지난 16일 낮 12시. 창원 시내 한 식당에서 90대 두 어르신이 만났다.

두 분 다 신불산 빨치산 투쟁을 같이했고 신불산 빨치산 중 마지막으로 체포됐다. '마지막 빨치산'이었지만, 한 분은 교도소 출소 후 부산에 살면서 아직도 통일운동을 하고 있다. 다른 한 분은 이제는 생업 전선에서 은퇴하고 창원의 한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며 자신의 생애사를 구술하고 있다.

1954년 12월 28일. 부산지방법원 형사합의 제1부는 신불산 빨치산 마지막 생존자 송상준(가명 길토목) 김정수(가명 백설암)에게 사형, 장두천(가명 장혁) 구연철(가명 김영수)에게는 무기징역, 이만용(가명 백운봉)에 대해서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날 이후 두 분은 얼굴을 마주 본 적도 없었고, 사실상 연락도 소식도 끊겼었다.

구연철(이하 구): "사형 선고받은 너하고 길토목이를 위해 우리는 항소 안 하기로 했다 아니가. 이만용이도 의용경찰대 중대장까지 했던 사람인데 법정에서 '우리가 생포해서 함께 활동했다'고 증언해서 무죄로 풀려났고."

이 기억은 판결문으로 보면 왜곡돼 있다. 이만용은 의용경찰대 출신은 맞고, 실제 의용결찰대 시절 빨치산과 교전 중 팔에 총상을 입고 빨치산에 생포됐다. 이후 빨치산의 치료를 받으면서 함께 행동하게 됐다. 하지만 판결문 기록을 보면 무죄 방면이 아니라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김정수(이하 김): "나는 항소하면 무기로 감형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가 사람을 막 죽인 것은 아니지 않나. 교전 중에야 어쩔 수 없었지만 보급투쟁에 나가서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단지 길토목이와 나는 전투부대원이었기에 사형, 너하고 장혁이는 당 사업을 주로 했기에 무기였던 거라.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판결문에 나오는 5명의 피고인 중 김정수(93) 씨는 대구고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형기 만료를 6개월 정도 앞둔 1976년 광복절 특사로 경주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김 씨는 22세 때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통영을 점령한 8월 17일, 인민군이 주둔해있던 통영우체국으로 찾아가 자진 입대했다. 하지만 다음날 국군 해병대가 원문고개를 점령하고 통영을 탈환하자 인민군과 함께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당시 지리산은 해방구였다. 전북 남원 인월 일대에 주둔하던 김 씨는 당시 조선노동당(이하 조로당) 경남도당 위원장 김삼홍(진해 출신)의 지시로 조로당 동해남부 지구당 및 남도부(함양 출신 하준수. 한국전쟁 중 이북의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전을 집중적으로 배운 후 '중장' 계급장을 달고 대원 150여 명과 함께 부산을 공략하고자 백두대간을 타고 남하해 태백산과 신불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였던 부대의 사령관) 부대와 연락하기 위해 신불산으로 이동 후 그곳에서 전투 대원으로 빨치산 투쟁을 이어갔다. 1953년 하반기 부산에 침투해 미군 부대 노무자로 일하던 중 1954년 초 경찰에 체포됐고 22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고향인 통영에서 수산업 관련 회사에 취직해 생계를 유지하다가 최근 창원으로 이사해서 정착했다.

▲ 창원 한 식당에서 만난 구연철(왼쪽) 씨와 김정수 씨.  /정성인 기자
▲ 창원 한 식당에서 만난 구연철(왼쪽) 씨와 김정수 씨. /정성인 기자

구연철(90) 씨는 1심 판결에서 항소하지 않아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역시 감형돼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가 1974년 12월 30일 광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양산에서 태어나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탄광 노동자로 일하던 군함도로 가서 살다가 해방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며 인쇄노조 활동을 하던 구 씨는 이 일로 경찰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하지만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활동이 어려워지자 부산행을 택했다. 부산에 정착하려던 중 전쟁이 터졌고, 그해 7월 10일 신불산에 입산했다. 이후 조로당 울산군당, 양산군당 등에서 조직 관련 일을 주로 수행했다. 출소 후에는 부산 해운대에서 오리 사육과 음식점을 했다.

이런 두 어르신은 만남의 기쁨을 잠시 나눈 후 함께했던 동지들의 안부를 묻고 답하며 한참을 얘기했다.

구: "장두천이도 죽고 송상준이도 죽고 다 죽었다. 이만용이 소식은 모른다. 다른 사람은 다 죽었고 나만 살아있다."

김: "장두천이도 죽고 길토목이도 죽었다고?"

구: "그래. 길토목이는 북송돼 가서 죽었다는 소식을 몇 년 전 들었다."

길토목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비전향 장기수 북송 당시 평양으로 갔다.

구: "참 , 네 자형 신재흔 동지는 어찌됐노?"

김: "자형도 죽었다. 전향하지 않고 광주교도소에서 나보나 몇 년 먼저 출소했는데, 출소하고 나서는 결국 가족들 생계를 위해 전향했다."

김 씨의 자형 신재흔은 김 씨가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추천으로 <자본론> <변증법적 유물론> <종의 기원>을 비롯해 각종 사회주의 사상서를 접했던 것. 자형은 일본인 운송회사 통영지점 지배인으로 있다가 해방되자 지하로 들어가 당 조직사업을 맡았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됐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전향' 문제로 흘렀다.

김: "나는 부산형무소 있을 때 3사 독방에 있었지. 너는 몇 사에 있었노?"

구: "나는 1사에 있었지."

김: "1사하고 2사에는 독방도 있었고 잡방도 있었지만 3사는 전부 독방이었다. 거기 독방에 갇혀있는데 밥은 5등식 아니가. 이게 딱 '코끼리 코에 비스킷'인 거라. 이걸로 하루 3끼를 먹는데 먹는 게 워낙 적으니 대변을 1주일에 한 번 보는 거라. 이게 속에서 얼마나 딱딱해졌는지 그만 하혈을 하고 말았어. 그래 의무실에 실려 가 1주일을 실신했던 적이 있었다. '이러다가는 죽는구나' 싶더라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서 결국 전향서를 쓰고 말았지. 뭐 특별히 전향을 강요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고…."

구: "그래, 너는 전향해서 사역도 나가고 그랬잖아. 나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도소장이 보잔다고 해서 갔어. 갔더니 소장이란 작자가 테이블에 두 발을 꼬고 얹은 채 '니 애비 죽었다. 여기 사인하면 장례 치르도록 특별휴가 사흘 줄 테니 사인해라'라는 거라. '네 아버지 돌아가셨다'라는 말이 그리 입에서 안 나오던가, 이건 인권 모독이라. 그래 고함을 쳤지. '아무리 그래 봐라 내가 전향하나'라고. 이후 독방으로 돌아와 통방(교도소 벽을 두드리며 대화를 주고받아 옆방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아버지 돌아가신 일을 알렸더니 다들 아버지를 추도하는 의미로 하루 단식을 결정했어. 이후로도 전향을 강요하는 온갖 집요한 책동이 있었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전향하고 안 하고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전향하지 않으면 인간 이하의 모욕과 수모를 견뎌야 했지만 전향을 한 김 씨는 교도소 내 인쇄소로 사역을 나가게 된다. 그러자 밥도 1등식으로 바뀌고, 무엇보다 스스로 일본어로 된 인쇄 관련 책자를 구해 읽으면서 지식과 기술을 터득하고 결국 교도소 내 인쇄공장 책임자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출소 후 김 씨는 인쇄 업종과는 관계없는 분야에 종사했다. 구 씨는 해방 후 인쇄노조 일을 했지만 역시 출소 후 그쪽과는 관계없이 살아왔다. 묘하게 겹치는 '인쇄'지만 현재로서는 무슨 의미를 찾기 어렵기도 하다.

두 분은 출소 후 행보도 달랐다.

구: "오는 25일에 부산지역 통일 일꾼들과 신불산 현장 답사하러 간다. 이번에는 신불산까지는 가지 않고 가지산으로 간다."

김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 "음식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그게 건강에 제일 좋다."

구: "그래 건강해야, 살아있어야 또 만나지."

그날 오후 7시 부산에서 열릴 집회에 참가해야 한다며 구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시간에 걸친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 신불산 빨치산은?    우리 민족이 해방되기 전부터 전국 곳곳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세력의 핍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 속에서 하산하지 않고 산속 활동이 이어지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부터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도 본격화됐다. 이미 지리산 빨치산에 대해서는 영화나 소설로도 나와 많이 알려졌지만, 실상은 38선 이남 대부분의 산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졌다.
그중 한 곳인 신불산에서도 빨치산 활동이 왕성했다. 특히 신불산에는 북한에서 전문적인 유격투쟁 훈련을 받고 태백산을 통해 남하한 남도부(본명 하준수·함양 출신)가 이끄는 전문 유격대는 물론,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100여 명이 합류하고, 부산권을 중심으로 좌익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입산하면서 한때는 300명이 넘는 유격부대가 편성되기도 했다. 한때는 대구 동촌비행장을 점령하는가 하면 부산 수영비행장을 급습해 각종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다. 국군과 UN군 기동로를 매복 공격해 군용트럭을 불태우는 등 활동했지만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국군의 토벌이 시작되자 서서히 소멸해갔다. 더구나 조선노동당 111호 결정문이 하달됐는데 모두 하산해 지하당을 복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53년 말 김정수·구연철은 물론 당시 살아있던 장혁·길토목·이만용 등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빨치산 투쟁도 끝을 맺었다. 이에 앞서 남도부·지춘란 등은 대구로 침투하다가 붙잡혀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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