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시골 노인 찾아가는 의사
진료실서 만나는 건 증상이지만
왕진하면 저마다 놓인 상황 보여
소외된 이 돌보며 의사 역할 성찰

병원을 탈출한 의사. 그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기다리기보다 병원을 찾지 못하는 아픈 사람 집으로 향했다.

강원도 왕진의사 양창모. 이웃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고자 의대에서 가정의학과 전공을 지원했고, 시민이 병원의 주인인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춘천의 일반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만두고 시골 노인가구를 찾아가는 '호호방문진료센터'에 몸담고 있다.

"진료실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환자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상상하기가 자꾸 어려워진다. 그분이 어떤 관계망 속에 있는 사람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왕진을 가면 이분이 이런 곳(집)에서 이렇게 사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병을 치료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그는 왕진이 마술을 일으킨다고 한다. 왕진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고.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는 의사지만 3분·6분 진료 시스템에 갇혀 누구보다 환자의 아픔에 둔감한 처방만 내리는 게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고 고백한다.

병원에 오지 못하는 형편의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내는 이웃들을 찾는 게 왕진 의사가 할 일이었다.

"하다 못해 마스크도 그곳을 잊지 못한다. 마스크에는 그날 왕진 다녀온 곳들의 냄새가 배어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찌든 습기가 구석구석 들어앉은 곳, 사람보다 곰팡이가 더 오래 살아온 듯한 곳에서 느껴지는 눅눅함. 가는 곳은 다르나 냄새는 같다. 사람들은 다 다르나 사는 모양새가 같은 것처럼."

유방이 나온 할아버지가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 여성처럼 나오는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인 약물. 양창모 의사가 살펴보니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약을 섞어서 복용하고 있었다. '여성형유방'을 유발하는 약품 목록과 일일이 대조해 원인이 될 만한 약들을 빼고 대체약을 처방했다. 재처방에 20분이 걸렸다. 그는 "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고 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나처럼 시간 많은 의사가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계속 유방암 치료제 중 하나인 타목시펜을 복용했을지도 모른다"고 기록했다.

그는 병을 고치는 의사와 약이나 주사를 잘 쓰는 의사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의학은 환자의 병이 어떤 삶에 놓여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절염은 분명히 관절에 무리를 주는 자세나 일을 강요하는 어떤 계급 혹은 계층에서 더 잘 발생한다고 봤다.

"좋은 의사란 무엇일까. 늘 내 마음속에 있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도 늘 달랐다. (중략) 의사는 어둠 속에서 꼬리를 더듬는 사람이다. 그 꼬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예기치 않게 코끼리를 만나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것은 증상이지만 뿌리를 쫓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과 이를 강제하는 사회라는 코끼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아프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다."

세상이 바뀔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 없다. 장 할머니의 관절염을 치료한 사람은 약을 처방했던 자신보다 쪼그려 앉아 손빨래를 하던 할머니에게 세탁기를 선물한 익명의 의료협동조합 조합원이 아닐까 여긴다. 무엇보다 의료인에는 의사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 오래 20년 넘게 방문 간호를 한 최 선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 선생과 함께 있으면 아픈 이들의 집이자 병실이기도 한 그곳이 어느새 포근한 공간이 된다. 어르신의 기저귀를 갈고, 소독약보다 흙냄새 나는 말을 하는 간호사와 마을 활동가들 동행 덕분에 그는 오늘도 왕진 가방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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