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터치식 전환·점자 없어…기능 추가 시 가격 상승 '차별'
점자 스티커 제공·수어 보조 등 업계, 접근성 부족 개선에 착수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으로 가전제품은 똑똑해지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탑재돼 누르는 단추가 사라지고 접촉만으로 작동하는 터치 방식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정작 이런 변화는 장애인에게 '독'이 되고 있다. 더 편리함을 누리는 진화에서 장애인의 인권은 외면받고 있다.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장애인이 사용할 때 가전제품 조작 문제점, 터치식 가전제품 체험과 함께 제조사의 대안을 살펴봤다. 

◇기술 발전했지만 역차별 = 올해 1월 25일 유튜브에 미국의 접근성 전문가이자 시각장애인 루시 그레코(Lucy Greco)는 LG전자 드럼세탁기의 불편함을 지적하는 영상을 올렸다.

루시는 이 세탁기가 스마트폰과 호환되는 데다 사용자 평이 좋아 구매했지만, 일부 터치식과 무한으로 돌아가는 다이얼 때문에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이 사용하기엔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한국 시각장애인들도 루시처럼 최신 전자제품 사용에 불편함을 호소했다. 최근 나오는 전자제품들은 대부분 버튼식이 아닌 터치식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처럼 점자도 없다.

▲ 지난 1월 25일 미국의 접근성 전문가이자 시각장애인 루시 그레코 씨 유튜브에 올라온 한 영상. 루시 씨가 LG전자 드럼세탁기 사용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 지난 1월 25일 미국의 접근성 전문가이자 시각장애인 루시 그레코 씨 유튜브에 올라온 한 영상. 루시 씨가 LG전자 드럼세탁기 사용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진상철 경남도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장은 "가전뿐만 아니라 아파트 현관 입구, 현관 도어록까지 터치로 돼있어 집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며 "그나마 전기밥솥이 뭘 누른 건지 음성지원이 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특히 제품이 발전함에 따라 비장애인은 편리할지 모르나 장애인에게는 역차별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게 각종 인공지능, 음성인식 기능이 포함된 가전제품은 보급형 기종보다 가격도 비싸다.

한 LG베스트샵 관계자는 "장애인만을 위한 제품이 따로 있지는 않다"며 "다만 신제품 중 장애인 소비자가 이용하기 쉬운 인공지능, 음성인식, 사물인터넷 기능이 탑재된 가전은 있는데 그런 제품은 일반 제품보다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터치식 눈 감고 써봤더니 = 창원시 한 가전제품 판매 전문점에서 눈을 가리고 세탁기, TV, 밥솥, 가스레인지 등 터치식 가전을 사용해봤다.

100% 터치식 드럼세탁기 앞에서 우선 어떻게 여는지부터 막혔다. 그냥 육면체의 무언가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세탁기 외부를 아무리 만져도 버튼처럼 굴곡진 게 없어 난감하다. 더듬다가 얻어걸려 터치식 전원을 켜긴 했지만 '띠리링' 소리와 함께 '세탁 방식을 선택해주세요'라는 기계음만 들렸다. 다음 단계를 위해 무엇을 눌러야 한다는 소리였다. 답답함에 눈을 떠버렸다.

▲ LG전자가 시각장애인 특화 음성 매뉴얼을 도입한 세탁건조기를 선보였지만 모든 조작을 터치로만 할 수 있어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안지산 기자
▲ LG전자가 시각장애인 특화 음성 매뉴얼을 도입한 세탁건조기를 선보였지만 모든 조작을 터치로만 할 수 있어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안지산 기자

밥솥은 밥솥 뚜껑 조작 외에는 전부 터치식이다. 터치하면 '압력 취사' 등 기계 음성이 안내하지만, '띵' 소리만 나는 제품도 있다. 밥솥 역시 터치해야 하는 곳을 찾지 못해 조작 난도가 높은 편이다.

가스레인지는 최근 전기로 요리를 하는 인덕션으로 바뀌는 추세다. 완전 평면에 터치식이 도입되고 있다. 인덕션은 온도를 올리고 내리는데 효과음이 똑같아 고온인지 저온인지 소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TV는 리모컨 음성인식으로 쉽게 원하는 채널을 볼 수 있었다. 구식 세탁기, 냉장고, 밥솥, 가스레인지는 활용하기 쉬운 편이다. 버튼식이라 하나씩 눌러보면 자연스레 위치와 촉감을 익힐 수 있다.

◇업계 "장애인 편의 기능 강화" = 삼성전자는 올해 청각장애인을 위해 TV에 수어 확대 기능을 새로 적용했다. 수어 확대는 TV 화면에 수어 보조가 나오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확대해주는 기능이다.

LG전자는 올 3월 세탁건조기 '트롬 워시타워'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화 음성 기능을 도입했다. 사용자가 직접 제품을 만지면서 문을 여는 방향, 조작부나 버튼 위치 등을 쉽게 연상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이 제품 조작부를 읽을 수 있도록 점자로 만든 스티커도 제공한다.

▲ 뜨거운 불을 다뤄 주의가 필요한 인덕션이 완전 터치식으로 만들어져 눈을 감고는 사용하기 어렵다. /안지산 기자
▲ 뜨거운 불을 다뤄 주의가 필요한 인덕션이 완전 터치식으로 만들어져 눈을 감고는 사용하기 어렵다. /안지산 기자

또 LG전자는 루시 그레코의 불편에 화답한데 이어 루시와 협업해 접근성을 높인 전자제품을 판매할 계획이다. LG전자는 지난 3월 루시에게 세탁기 점자 스티커를 전달하고 제품 개발 과정에서 자문을 하겠다고 밝혔다.

업계는 터치식 전자제품 개발이 전반적인 흐름이라 터치식 가전을 만들되 다방면으로 문턱을 낮추는 방식을 고민하겠다는 입장이다. LG전자처럼 점자 스티커를 제공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사물 인터넷을 활용하거나, 음성인식을 활용할 수 있게 해 몸이 불편한 이들도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최근 출시되는 가전제품은 터치 외에도 음성인식으로 명령할 수 있고 인공지능이 알아서 사용자 움직임이나 패턴을 파악해 더욱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며 "편리한 기능을 많이 도입해 격차를 보다 좁히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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