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 발판 삼아 자산가로 성공
재산 친구·노동자에 나눠주고
민주화 운동가 뒷바라지 헌신
"노인들 저 모양인 거 봐둬라"
'시대의 어른' 표상으로 남아

오척단구 거한, 천진난만한 기인, 거리의 철학자, 민주화 운동 숨은 후원자, 신용불량자가 된 거부, 효암학원 이사장 할배….

너무나도 다양한 수식어를 가졌던 '이 시대의 어른' 채현국 효암학원 명예이사장이 지난 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일제강점기인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순탄하지 않았던 시대를 거침없이 살았던 그가 떠난 자리에는 다양한 수식어처럼 많은 이들이 저마다 만난 '채현국'을 기억하고 있다.

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1년 중앙방송(현 KBS) 연출로 입사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부도 직전인 탄광으로 갔다. 방송을 군사정권 선전도구로 써먹으려 하는 현실을 봤기 때문이다. 이후 가업을 일으켜 흥국탄광을 굴지의 광산업체로 키우고 한때 조선·화학·해운 등 24개 기업을 운영하며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거부가 됐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거부가 된 그가 보여준 행보는 대부분 돈과 권력에 길드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사뭇 달랐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를 시작하자 정권과 유착하지 않으면 더는 사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는 미련없이 사업을 접고 재산을 처분해 동업하던 친구와 광부들에게 나눠줬다.

파격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도피 생활을 하는 이들을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재에 저항하는 자유인으로 그들과 함께했다. 당시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의 집을 사줬다는 일화는 '돈'과 '사람'에 대한 그의 철학을 잘 드러낸다.

▲ 고 채현국 효암학원 명예이사장이 생전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고 채현국 효암학원 명예이사장이 생전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가 교육자로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은 1988년 양산에 있는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를 둔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일하면서다. 앞서 부친인 채기엽이 1968년 효암학원을 인수했지만 그는 이사장 취임 전까지 학교 운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사장 취임 후인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가입 교사를 해직하라는 당시 문교부 공문이 내려왔지만 효암학원에는 한 명의 해직자도 없었다. 재직 내내 무급으로 일했던 그는 학교 운영에 간섭하기보다 자율성·자발성을 강조하며 교사와 학생이 학교 운영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효암학원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빈소를 마련한 서울대병원을 찾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양산 개운중학교에 임시분향소를 차렸다. 3·4일 이틀간 분향소를 지킨 효암고 이강식 교감은 그가 이사장 시절 풋내기 교사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교감은 "이사장 할배는 입버릇처럼 '학생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며 교사의 성장이 학생의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며 "기존 제도권 교육 모순을 지적하며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새로운 학교 전통을 만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에 공감한 많은 이들이 분향소를 찾아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지금 노력 안 하면 너희도 저 꼴이 된다."

그는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자유인으로 험난한 시대를 헤쳐왔던 그가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치는 과정'이라며 정답이 아닌 무수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삶은 2015년 <경남도민일보>가 펴낸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한 권의 책 속에 꾸밈없이 녹아 있다.

당시 4차례에 걸쳐 그를 인터뷰한 김주완 전 출판미디어국장은 "채 이사장이 나를 '형'이라고 불러 당황한 적이 있었다"며 "물리적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통적인 경험만을 가진 세대보다 새로운 문화와 기술 등을 더 다양하게 접하는 젊은 세대가 오히려 '어른'이라고 설명하는 모습은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보는 자유인 그 자체였다"고 기억한다.

어른이 사라졌다고 외치는 시대에 지난 2월 '영원한 청년, 백기완 선생'을 떠나보내야 했던 우리는 또다시 '이 시대의 어른, 채현국'을 보내며 '동행하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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