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8경서 춤 여정 영상 담아 "동작 많으면 공간이 가려져
자연 속 '나'는 중요하지 않아" 오랜 기간 치유 수업에 몰두
성폭력 피해자·발달장애 아동 몸으로 자신 표현하도록 도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입을 가린 채 대화한 지 2년째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던 공간이 사람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끝없이 밀려나고 있진 않은지 걱정도 됩니다. 유연함 속에 단단함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술인입니다. 예술적인 사람이자, 사람 그 자체가 예술인 그들을 만나봅니다.

▲ 2006년 부산 아트캠프 '오리(五里)'. /미야아트댄스컴퍼니
▲ 2006년 부산 아트캠프 '오리(五里)'. /미야아트댄스컴퍼니

'몸이 생각을 변화시킨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사람.

무용가 강미희(57)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통영에 정착한 지 4년째 여전히 자유로운 춤을 추구하고 자신을 비워내며 오늘을 살아낸다.

◇통영 8경 춤 여정 = 강미희 무용가가 요즘 집중하는 작업은 통영 8경 곳곳에서 펼치는 춤을 영상으로 소개하는 일이다. 통영의 영상 전문 스타트업 'The QR(더 큐알)'과 협업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7월까지 기간을 잡고 있다. 영상 두 편은 유튜브 채널 '미야아트댄스컴퍼니'에서 볼 수 있다.

산양읍 달아공원에서 춤을 추는 영상을 보자. 발끝에서 시작해 뜨는 해를 어루만지는 그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1분 33초의 짧은 영상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3주 전에 올린 남망산조각공원은 또 어떤가, 춤 여정을 보면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대자연임을 일깨운다.

"제 춤은 동작적이라기 보다 시각적입니다. 동작을 많이 하면 공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나는 중요하지 않고 그 무엇이 중요합니다."

몸을 많이 쓰고 다리를 들어 올려 균형을 잡고 기술적인 것을 잘하는 무용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태워 공간을 드러내는 춤꾼도 있기 마련이다.

그가 통영에 돌아와 처음 선보인 공연은 지난 2019년 '조우' 였다. 윤이상기념관 기획공연으로 선보였던 무대로 헝가리·룩셈부르크·미국 무용가들과 즉흥 춤을 추고 독무로 '조우:우연한 만남'이라는 작품을 올렸다. 2018년에는 통영시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과 공동으로 '제1회 아트캠프'를 열기도 했다. 세자트라 숲에서 아동·청소년을 비롯한 시민들에게 신체 표현 수업하는 공동작업을 펼쳤다.

▲ 2018년 부산국제즉흥춤축제. /미야아트댄스컴퍼니
▲ 2018년 부산국제즉흥춤축제. /미야아트댄스컴퍼니

◇치유 몸짓, 몸 수업 = 통영에 돌아오기 전 그는 부산에 살았고 그곳에서 활동했다. 그때 그는 무대 위에서 추는 춤보다 아픈 이들을 만나는 데 미쳐있었다. 발달장애 아동, 성폭력 피해자들과 몸 수업을 했다.

시간을 거슬러 2002년. 그가 서울 예술의전당 소극장에 '미야(美野·Beautification of the Wild)'라는 독무를 올렸을 때다. 당시 공연을 본 여성민우회가 강미희 무용가를 이후 강사로 초대한 것이 '치유로서의 몸짓'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제 춤을 본 관객이 따로 찾아왔어요. 여성단체 회원들이 자기표현 워크숍 강사로 저를 초청했고 '자아를 찾아가는 춤 여행' 이라는 강연을 했어요. 참가자들이 몸 표현으로 소통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죠."

강미희 무용가는 춤은 누구나 출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아동이 말이 아닌 몸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가 몸은 변화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치유했다.

"그들을 만나보면 몸에 대한 고찰을 멈춘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그 곳, 성기만 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 아이들 앞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너희의 몸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몸은 그곳만 몸이 아니라 너무 다른 소중한 몸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 춤꾼 강미희의 활동을 보고 지인들은 말했다. 그렇게 도도하고 잘난 척하던 언니가 아이들한테는 어떻게 납작 엎드릴 수 있느냐고. 보호관찰소를 찾아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몸 수업'을 하는 그를 향해 대단하면서도 무섭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 1997년 안성 죽산국제예술제. /미야아트댄스컴퍼니
▲ 1997년 안성 죽산국제예술제. /미야아트댄스컴퍼니

◇5살에 시작한 춤 50대가 된 지금도 추는 춤 = 강미희는 1964년 통영시 동호동 144번지에서 태어났다. 강구안이 보이는 동피랑이 고향이다. 다시 돌아온 통영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말했다. 호기심 넘치던 아이는 약장사들의 천막극장에 문턱이 닳도록 찾아갔다.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같은 고유의 창극을 흡수했다. 약을 살 수 없는 어린 관객은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홀린 듯이 또 갔다.

"쌀가마니를 깔아 만든 객석에 앉아 있으면 쌀자루 천으로 가린 무대의 막이 열렸죠. 무대 뒤쪽에 몰래 가서 보니 선녀 옷 같은 것도 신기하고 그랬어요. 집에 오면 이불 포대기 같은 걸 걸어서 막을 만들고 봤던 춤이나 소리를 그대로 따라했어요."

집안에 춤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질이 남달랐던 그를 아버지는 알아봐 주고 지지해줬다. 11살 겨울 부산으로 갔고 무용을 배우고자 부모와 떨어져 살았다. 엄옥자 선생 집에서 살면서 한국창작무용에 입문했다. 부산 경성대 무용학과에 입학해서 남정호 선생에게 현대 무용을 통한 자유로운 춤 의식을 깨쳤다. 졸업 후 현대무용단 창단멤버로 활동을 하던 중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때 전위무용가 다나카 민 선생을 만나 무용단체 마이주꾸 단원으로 활동했다.

무용가 강미희의 심지는 자연을 벗 삼아 공동체 생활을 했던 1992년과 1993년에 굳어졌다. 일본 신체기상농장(body weather farm)에서의 일상은 늘 새로웠다. 물화(物化) 되는 것, 몸이 자연 일부로 귀화하는 미학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 각국 예술가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노동 과정을 통한 사색을 익혔던 시기였다.

▲ 강미희(왼쪽) 무용가가 지난 26일 통영시 봉평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다.<br /><br />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강미희(왼쪽) 무용가가 지난 26일 통영시 봉평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그는 다가오는 6월 한국현대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제40회 국제현대무용제' 무대에 오른다.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20분짜리 독무를 준비하고 있다. 5월에는 제14회 부산국제즉흥춤축제에도 참여한다.

"참 다행스럽게 중간에 깨짐 없이 지금껏 꾸준하게 춤을 출 수 있어 다행입니다. 생산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환원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무용가로서만 아니라 춤으로 기른 경험을 통해 아픈 사람을 만나 치유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어요. 이게 제 삶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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