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와 경칩 사이 남도엔 매화가 폈다. 불모·화산 남동쪽의 장유 관동고분공원에 만개한 매화 한 가지를 코에 당겨 매향을 맡았다. 서늘한 듯 맑고 감미로운 맛이 기분을 돋우지만 그를 차마 형용키는 어렵다. 차가운 날씨 탓에 꿀벌은 날지 않고 새들은 여기저기서 울며 노래하는데, 인적을 피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본성을 잃지 않는 짐승인지라 그윽한 향기에 취했나 보다.

매향은 신명(神明)이 제물(祭物)을 흠향하듯 자취가 은미하다. 그래서 그 참맛을 나이 들도록 알지 못했던 걸까. 한 송이 꺾어 들고는 문득, 그 향을 빼어 닮은 난초와 국화를 떠올렸다. 매·난·국·죽. 그렇다면 이른바 사군자는 향기로써 벗을 맺은 사이가 아닐까?

'멀리서 봐도 눈이 아닌 줄 아는 것은 그윽한 향기가 오기 때문(遙知不是雪 有爲暗香來)' 당송팔대가인 왕안석이 '암향'이라 표현한 것이나, '마지못 새이는 향내 더욱 그윽하여라' 위당 정인보 또한 매향을 가뭇 스며나와 그윽하다 할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문호들도 향기를 묘사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국화 향은 어떨까. 다석자 유영모의 일기에서 본다. '元月摘霜菊 餘香惹九秋. 정월달에 눈 속에서 마른 국화를 뜯어보니 작년 가을의 향기가 여전히 남아있더라는 말에 무엇인가 느낌이 컸다. 사람이 살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죽으면 언제나 그들과 같이 있다(過化存神).'

가람 이병기는 연시조 '난초'의 한 장에서 책장 바람에 밀려오는 난향을 간접으로 그렸다.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장장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그런데 매화, 난초, 국화는 분명하지만 대나무에도 향이 있을까. 맹호연의 시에서 묘한 한 구절을 찾았다. '하풍송향기(荷風送香氣) 죽로적청향(竹露滴淸響), 연꽃에 부는 바람 향기를 실어오고 댓잎 이슬은 맑은 소리로 방울지네.' 귀로 듣는 음향을 마치 코로 맡는 내음처럼 치환한 명구다.

이번 봄날의 매향으로 사군자의 고절은 그 향기에서 비롯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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