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가두방송 후 고문 당한 전옥주 선생
차별 철폐 몸 바치고도 차별 대우 받다니

백기완, 정경모, 전옥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운동가들이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떴다. 한국 현대사 굴곡을 온몸으로 감당한 위인들이라고 통념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분들이다. 앞의 두 분은 이름만으로도 잘 알려지지만, 세 번째 분은 풀이를 곁들여야 한다. 그래도 생전 행적만 언급하면 누구나 알 만한 분이다. 전옥주 선생은 광주항쟁의 스피커였다. 가두의 '언론'으로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역사를 일군 당사자가 감당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옥주 선생이 서거하자 언론은 "모진 고문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라고 썼다. 이 짧은 서술로는 선생이 생전에 감당한 일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백기완 선생 영전에 누군가는 생전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살았다는 평가를 바쳤지만 그런 평가가 더 들어맞는 분은 오히려 전옥주 선생이다. 백 선생은 수감 도중 극심한 고문을 당한 후 죽음이 눈앞에 다가옴을 느끼며 장시 '묏비나리'를 썼다.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걸로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민중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초를 묘사한 대목이지만, 어떤 과장도 비유도 아닌 선생이 실제 당한 고문이 그랬을지 모른다. 청산유수의 말솜씨인 선생이라도 이 부분에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꺾어야 했다. 그래도 선생은 이렇게라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살았다. 비슷한 곤욕을 겪은 전옥주 선생은 생전에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 자신에 대한 진상규명은 뒤로 미루었다.

전옥주 선생은 광주청문회에 출석했을 당시 신군부 세력에 겪은 고문을 증언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 말하지는 않았다. 듣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니 당신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말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을까. 항쟁 당시와 항쟁 이후 삶은 두 겹의 고통을 선생에게 주었을 것이다.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받아 한동안 타지를 떠돌았다고 한다. 선생이 "모진 고문"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은 세월이 더 흐른 후에 드러났고, 항쟁 당시 계엄군이 조직적으로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건 근래에야 드러나고 있다.

육신이 이승을 떠나면서 선생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가늠해 본다. 가벼웠을까. 억울했을까. 백기완 선생은 주눅이 들지 않고 호탕하게 한 세상 누비면서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떠났다. 당신이 글에서 죽음이니 부활이니 하는 말을 토해내는 것은 체험에서 기인하거나 거칠 것 없고 자유분방한 기개와 상상력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여성만이 겪는 끔찍한 피해는 피할 수 있었기에 극단적인 상황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해괴한 생각도 든다. 말 못할 고초를 겪은 여성이라면 자신의 말을 하기 쉽지 않았음을 전옥주 선생에게서 본다. 항쟁의 스피커는 자신에 관한 스피커는 적극적으로 쓰지 못했다.

백기완 선생은 생전에나 사후에나 '선생'으로 불렸지만 전옥주 선생은 '씨'로 불렸다. 백기완 선생의 사후 일었던 거대한 추모 열기를 보더라도 비수도권에서 평생 살았던 여성 전옥주에 대한 대접과 대조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옥주 선생은 생전 인터뷰에서 광주항쟁은 극심한 호남 차별에서 일어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몸 바친 사람이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았다면 이를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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