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밖으로 내는 데 결심 필요하다 여겼던
그러나 말할수록 별 게 아닌 말에 대해서

우리 동네에는 '창원 여성의 전화' 사무실이 있다. 페미니즘을 배우기 딱 좋은 동네에 사는 것이다. '여성의 전화'에서는 정기적으로 여성을 위한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아동 성 평등 강사 교육 양성과정'도 그중 하나였다. 주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강의가 이어졌다. 강의실에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은 한 강사가 종이를 나눠주며 자신이 생각하는 '섹스'를 그려보라고 했다. 그동안 살면서 예술, 문학, 전통이 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아본 적은 있지만, 섹스가 뭔지에 대해선 서른여섯 해를 살면서 처음 들어보았다. 놀라운 질문이었다.

무엇을 그리면 좋을까 고민했다. 본능적으로 떠오른 것은 이성 간의 섹스 장면이었다. 나는 이토록 고루한 인간이다. 그다음은 순정 만화잡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밍크>, <파티>, <이슈> 같은 순정만화의 수많은 로맨스를 보면서 연애와 섹스를 학습했던 십 대 시기가 생각났다. 언제나 뿌옇게 처리되는 결정적(!) 장면, 그리고 마치 득도한 듯한 주인공의 묘한 표정을 보면서 '대체 섹스란 무엇인가?' 궁금했던 시절. 내게 연애와 섹스는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닌 미지의 인물들이 아름답게 사랑하는 환상에 가까웠다.

나는 결국 만화 속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을 그려냈다. 섹스에 관한 가장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무난하고 안전해 보이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다. 쓱쓱- 스케치와 색칠의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강사가 물었다. 먼저 발표할 사람이 있느냐고.

모두가 머뭇거리는 중, 한 10대 수강생이 씩씩하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와 그림을 공개했다. 흉터 있는 몸이 그려져 있었다. 수강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신은 오랫동안 몸에 있는 큰 흉터를 콤플렉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흉터를 숨겨야 할 것, 나중에 없애야 할 것으로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롭게 사귄 애인을 만나면서부터 흉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흉터를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흉터를 자연스럽게 몸 일부로 받아들이며 긍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다음은 50대 수강생이 앞으로 나왔다. 종이에는 아파하는 한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50대는 예, 섹스가…참 아픕디다."

곳곳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픔'의 속뜻을 이해하는 동안 조금 전 발표를 마친 10대 수강생이 진지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수강생은 질 건조에 효과 좋은 윤활제 제품을 두 가지나 추천했다. 그 말을 들은 50대 수강생의 다소 굳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10대와 50대의 차이일까. 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30대의 내게 '섹스'란 말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막상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는 어떤 결심이 필요한 말이었다. 섹스(性)를 당연히 '성교'라고 인지하는 세대와 섹스는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대의 중간쯤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듣는 여성들은 나이부터 외형까지 제각기 달랐다. 쇼트커트와 장발. 노브라와 교정 속옷. 민낯과 풀 메이크업. 10대와 50대. 섹스를 명료하게 말하는 사람부터 수줍게 말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여성이 각자가 생각하는 섹스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섹스에 대해 마음껏 떠들었다. 섹스섹스섹스! 말할수록 별 게 아닌 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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