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간 주민에 시달려 고통
유족, 근로복지공단 상대 승소

최근 배달노동자들이 갑질 아파트 명단을 발표해 논란이 됐다. 아파트 값이 비싸다 해도 누군가의 인격을 짓밟을 자격까지 포함돼있진 않다. 인격이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배달노동자뿐 아니라 경비원, 청소부, 택배기사의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과도한 민원에 시달리던 양산 한 아파트 관리소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지 3년 만에 이 죽음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지난 2017년 7월 22일 새벽 김해 야산에서 양산 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던 ㄱ(사망 당시 52세)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숨지기 이틀 전 관리업체 대표에게 그만두겠다는 뜻을 통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ㄱ 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속된 악성 민원 = 유족들은 ㄱ 씨가 사망하기 전 입주민 간 갈등 중재와 민원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특히 입주민 ㄴ(46) 씨는 해당 아파트에 입주한 이후 ㄱ 씨가 사망하기까지 약 1년 8개월간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ㄴ 씨는 수시로 관리사무소를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어 꼬투리를 잡았다. 민원 내용은 주로 층간소음 문제로 ㄱ 씨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보통 2주 이상 민원을 넣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CCTV 사각지대가 있는 것도 ㄱ 씨 탓이었다. ㄴ 씨는 "내 차량이 사각지대에서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라며 ㄱ 씨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ㄱ 씨 사망 두 달 전에는 ㄴ 씨가 ㄱ 씨 근무시간이 아닌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시간에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2017년 7월 ㄱ 씨는 두 차례 병원을 찾았다. 당시 상담기록에는 '일은 다니는데, 직장 다니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밤에 자려고 누워 있으면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혹시 이런 문제로 직장 생활을 못해 잘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업무 때문에 상당한 압박을 받아왔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ㄴ 씨는 20일에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ㄱ 씨에게 일방적인 질책과 폭언을 쏟아부었다. 이날 퇴직 의사를 전한 ㄱ 씨는 1시간 일찍 퇴근해 아내에게 "모든 사람이 나를 모함하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관리업체 대표는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에 "주말을 쉬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으나, 22일 오전 3시 30분께 ㄱ 씨는 "산책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외출했고 끝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법원 "산재 인정" = 유족 측은 "ㄱ 씨 사망이 업무상 스트레스에 따른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 측은 2018년 7월 '망인이 업무적 스트레스에 의해 판단력 상실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망인은 개인의 경제적 문제, 정신적 취약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며 부지급 결정 처분을 내렸다. 이후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에 재심사 청구를 했으나 이 역시 기각됐다.

그러나 법원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지난해 9월 ㄱ 씨 유족(원고)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입주민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민원 제기가 ㄱ 씨 사망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업무상 스트레스가 개인적인 경제적 문제와 정신적 취약성 등 요인에 겹쳐서 우울증세가 유발·악화됐다"며 "그 때문에 정상적인 인식능력, 행위 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없거나 현저히 저하돼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ㄱ 씨가 과거 공황장애 치료를 받은 개인적 소인이 있으나 2006년 1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사망 무렵 상당히 증가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작용해 소인 발현에 영향을 미쳤다"며 유족들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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