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함안 가야읍의 추억담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려내

살다 보면 삶이 언제 이렇게 흘러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여든을 훌쩍 넘긴 홍진기(85) 시인에겐 더욱 그렇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인은 자꾸만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그가 최근에 낸 아홉 번째 시집 <배나무 없는 배나무실>에는 뒤돌아본 그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배나무실은 그가 태어난 함안군 가야읍 이곡(梨谷) 마을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가 뒤돌아본 곳은 고향입니다. 하지만, 시집에 담긴 고향은 당장에라도 달려갈 수 있지만, 막상 가지는 못하는 곳입니다. 고향을 바라보는 순간 시인은 자꾸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배나무실은 시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그리움이겠지요.

▲ 〈 배나무 없는 배나무실 〉 홍진기 지음
▲ 〈 배나무 없는 배나무실 〉 홍진기 지음

"연둣잎 잎눈보다/ 보드라운 이 봄날에// 뙤창문 좁은 틈으로/ 손만 내민 아침 해// 빛켜가/ 쌓이는 소리/ 아기 나비 눈뜨는 소리// 내 고향 배나무실/ 배꽃은 피었을까// 도랑물 넘치도록/ 봄비 흠뻑 다녀간 뒤// 솔숲에/ 숨던 까투리/ 짝은 하마 찾았을까"('고향 소식' 전문)

시집 속 배나무실은 항상 봄 같은 분위기입니다. 따뜻한 추억이 많다는 뜻인 것 같아 안심입니다. 시인은 어린 시절 그 봄을 걷고 또 걷습니다.

"옛집으로 가는 내 길은 여태도 쪽길이네// 안산에 봄이 오면 산도 들도 꽃 잔치로// 골마다/ 두견새 울어/ 아지랑이 절로 피는// 산개울 물이 불어 고라니 떼 모여들고// 새소리 길을 잃고 돌아오는 산울림// 물총새/ 살이 여물어/ 옹자물에 빠지는" ('고향길' 전문)

"강둑길 십리 남짓 징검다리 건너 또, 저만치/ 자연못 굽이돌아 내 할머니 무덤 지나/ 돌개울/ 눈석이 흘러/ 잠든 봄을 깨우네// 산을 친친 봄이 감고 아지랑이 타는 한낮/ 쑥국새 목멘 울음 고개티에 숨이 차서/ 간간이 / 우는 송아지/ 짝을 찾는 까투리// 강남 제비 돌아온다 기별 주고 가는 바람/ 봄 볕살 잗젊은 풀빛 간지러운 한나절/ 밉도록/ 찬란하여라/ 무겁도록 눈부셔라"('어린 고향 가는 길' 전문)

"물가에 버들보다 봄뜻에 먼저 달떠// 봇도랑 막아놓고 물오른 가지 꺾어// 첫잠에/ 빠진 들매화를/ 피리 불어 깨웠네// 사랑에 서툴러서 무작정 사무치다// 철없이 뜨거웠던 풋가슴에 몸이 떨려// 살구꽃/ 볼 젖는 아침/ 살품 되우 시렸네"('어린 봄' 전문)

그렇게 도착한 고향 마을 집에는 애잔한 기억으로 남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책 표지 뒤편 첫 장에 손 글씨로 인쇄된 시 '그리운 전쟁' 속에서 순한 눈이 사라지도록 환하게 웃는 어린 시인의 얼굴을 상상해봅니다.

▲ 시집 〈 배나무 없는 배나무실 〉중 홍진기 시인의 손글씨.
▲ 시집 〈 배나무 없는 배나무실 〉중 홍진기 시인의 손글씨.

"엄마는 날 때릴 때/ 수수비를 꼭 들었다// 단단한 부지깽이 두고/ 푸석한 수수비를// 속웃음/ 반만 참으며 나는/ 우물가를 돌았다"(사진)

눈물겨운 추억에서 빠져나오면 지금, 여기 있는 건 어느새 늙어버린 몸뚱이. 짧은 한숨을 쉬고 나면 저기 듬직한 자식, 어여쁜 손자가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부지 받아 가이소, 우리는 괜찮심더// 내 돈 있다, 아이들 공책 사조라// 아버진 딸에게 던지고 딸은 아버지 손에 쥐어주고……"('오천원' 전문)

"병풍 둘러 촛불 밝힌 무거운 제사상에/ 말 배우는 손자놈 '할버지 생일 축합니다'// 여태도 할아버지는 생일상을 받으신다// '할아버지 안경 안 쓰면 안 이뻐요 안경 써요'/ 할애비 위한 참 시인의 참 말씀을 들었네 // 그날로/ 예쁜이 오는 날은/ 안경알을 닦는다"('어린시인의 말' 전문)

그러니 늙는다는 게 영 나쁜 것만은 아닌 거겠지요.

도서출판 경남, 130쪽,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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