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공간 지키는 일 반복…손님과 유대 끊기고 혼잣말
성취·목표 손에 쥐는 삶 아닌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 집중
추워도 신나게 노는 딸들과 작은 일상도 감사하게 버텨

새벽에 차갑게 식어있는 카페에 도착하면 여기가 어딘가 싶은 마음이 든다. 테라스에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어 놓고, 온풍기를 틀어놓으면 어느새 훈기가 돈다. 하지만, 서걱거리는 감각은 줄어들지 않는다. 뭔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에 나만 혼자 있는 느낌이 든다.

밖은 아직 밤같이 어둡기 때문에 유리창은 거울처럼 혼자 있는 나를 비춘다. 커피 머신이 예열되는 동안 나는 며칠째 읽던 책을 꺼내어 놓고 이마를 누르며 뜨거운 물을 한잔 마신다. 이마의 어느 쪽에 미세한 구멍이 있고, 거기에서 걱정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신선한 원두를 갈아내고 그것으로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카페 곳곳의 빈틈이 보이고, 사소하게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난다. 활자도 눈에 들어온다. 책 펴고 몇 줄 읽는다. 문득 적막을 깨닫고 음악을 튼다. 요즘은 이렇듯 뭔가 놓치는 경우가 있다. 뒤늦게 튼 음악을 들으면서 남아 있는 커피를 홀짝인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또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신다. 빈 잔이 늘어날수록 유리된 감각은 옅어지고 그것과 같은 리듬으로 밖이 점점 밝아져 온다. 까마득했던 유리창 너머 산책로에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열심히 걷는 모습을 보면서 조심스레 걱정보다 작은 기대를 품어 본다.

하지만, 손님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기다림의 의미가 옅어짐을 느끼곤 한다. 내가 아무리 커피를 많이 마시고 준비가 되어 있다 한들, 내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셔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곳은 그저 텅 빈 공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난겨울 동안 깨달았다.

▲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 속눈썹에 얼음 꽃이 맺힌다.그렇게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작은 꼬맹이들을 돌보다 보면 여러 가지 걱정이 옅어지는 느낌이다. /정인한 시민기자
▲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 속눈썹에 얼음 꽃이 맺힌다.그렇게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작은 꼬맹이들을 돌보다 보면 여러 가지 걱정이 옅어지는 느낌이다. /정인한 시민기자

이번 시즌은 꽤 혹독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가 한 달 이상 지속하면서, 견디기 어렵다고 느꼈던 날들이 많았다. 텅 빈 매장을 지키는 일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끔 오는 손님을 밖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일도 처음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망하겠는 걸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나를 보곤 했다. 손님과의 유대가 끊어져 버린 공간은 카페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런 생각을 혼자서 하곤 했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었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다들 계획한 것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새해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다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어느 시점부터 그랬던 것 같다. 성취하는 것, 도달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고 기다리고 견디는 것이 더 어울린다.

앞날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주저앉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 좁은 길이구나. 아, 오르막길이구나 하면서 평소처럼 걸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와 비슷하게 기다릴 생각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그런 견딤은 절망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출근하는 거리에는 여러 카페가 열려 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혹은 조금은 다른 결을 가진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빚어낸 공간들이 텅 빈 채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각자의 슬픔을 감당하고 있지 싶다. 누군가 올 때까지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 겨울을 함께 견뎌냈으면 한다.

두 딸은 아내와 내가 만든 연한 보호막 속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둘째를 보거나, 밤이 되면 자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해하는 첫째를 보면서 그런 만족감을 엿볼 수 있다.

▲ 앞날은 알 수 없지만,그렇다고 포기하거나주저앉지는 않을 생각이다. /정인한 시민기자
▲ 앞날은 알 수 없지만,그렇다고 포기하거나주저앉지는 않을 생각이다. /정인한 시민기자

이 녀석들은 지금 지어진 작은 성이 꽤 흡족한 것이고, 여기에서 보내는 하루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이다.

주말에는 여전히 밖으로 나간다. 이번 겨울은 꽤 추워서 율하천이 얼어 있는 날이 많았다. 그곳에서 간이 썰매를 타거나, 어설픈 스케이트 놀이를 하면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 속눈썹에 얼음 꽃이 맺힌다. 작은 핫팩을 챙겨서 두 딸의 손도 녹이고, 내 손도 녹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흐르는 콧물은 호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그렇게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작은 꼬맹이들을 돌보다 보면 여러 가지 걱정이 옅어지는 느낌이다.

나도 아이처럼 얼음 위로 살그머니 올라가 보기도 한다. 얼음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두꺼웠다. 탁한 얼음 아래에는 모든 것이 가라앉아서 오히려 맑은 느낌이다. 잠든 듯 바닥에 붙어 있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도 보인다.

그래도 물은 흐를 텐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고요하게 있을까. 겨울을 무사히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서우에게 신기하지, 하고 물었다. 옆에서 얼음 조각으로 소꿉놀이를 하던 서우가 무심하게 말한다. "아주 천천히 집으로 가고 있겠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싹 마른 담요처럼 고소한 햇볕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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