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90년대 서적·회화 등
시대·문화적 노동자 삶 조명
지역 노동자 인터뷰 담은 책도
"근본 돌아보게 하는 전시"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 조졌다 한다 / 동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 / 사람들아, 사람들아. 난 신세 조진 것 없네 / 노동자가 언제는 별 볼일 있었나. 찍혀봤자 별 볼일 없네 / 친구들아, 너무 걱정 마라.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가 / 노동운동하고 나서부터 참삶이 무엇인지 알았네"(민중가요 '고백' 일부)

날이 어둑해진 지난 20일 오후 5시 48분께,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상갤러리 1층 전시장에서 민중가요 '고백'이 울려 퍼졌다. 이 노래를 작곡한 고승하(73) 아름나라 이사장은 이날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 20여 명 앞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이어나갔다. 노랫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고 이사장이 공연한 시간은 2분 남짓. 짧은 시간 이어진 무대였지만, 공연이 남긴 여운은 오래갔다. 그의 젊은 시절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갖던 시대적 의미가 그의 노랫말을 통해 그 시절을 겪지 못했거나 경험한 관람객들에게 강렬하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 기획전 '시대×노동×삶'전 출품작들. /최석환 기자
▲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 기획전 '시대×노동×삶'전 출품작들. /최석환 기자

코로나19 영향으로 발길이 뜸하던 상상갤러리에 모처럼 이 시각 관람객 20여 명이 발걸음하게 된 건 창원 노동문화에 초점을 맞춘 기획전시가 이곳에 차려져서다. 갤러리에선 이날부터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가 마련한 창원의 도시 문화를 기록하는 기획전 '시대×노동×삶'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 노동, 삶 등 3가지가 전시 주제다.

갤러리 지하 1층~지상 2층 전시실 각 층에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창원에 아로새겨진 역사적 사건, 통합 창원시 출범 전부터 켜켜이 이어져 온 노동자들의 노동문화를 엿볼 수 있는 1970~1990년대 서적, 사진물, 회화작업 등이 대거 나왔다. 창원의 도약을 이끈 노동자들과 그들이 형성해온 시대적·문화적 발자취에 주목한 결실이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지상 1층 전시는 '시대'를 주제로 꾸려졌다. 부제로는 '노동자와 함께 변화하는 시공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전시 공간인데, 전시 내용에서 노동자들의 어두운 단면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가로 73.3cm, 세로 57cm 크기의 창원 노동 문화사 연표가 벽면에 나붙었고, <창원 600년사>(2009), <사진으로 보는 경남 현대사>(2017), <마창진 공업 110년>(2010), <창원 국가산업단지 개발사>(2001) 등 창원의 역사가 담겨있는 책이 연표 밑 선반에 함께 놓였다. 문화사 연표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과거 역사적 사건만 간략하게 기록됐다. 지금의 진해구가 읍에서 시로 1955년 9월에 승격되었다거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행과 경남도청 창원 이전 설치 궐기대회가 1962년에 개최됐다는 식이다.

▲ 전시장 안 계단에 연도별 최저임금이 적혀 있다.   /최석환 기자
▲ 전시장 안 계단에 연도별 최저임금이 적혀 있다. /최석환 기자

노동자의 어두운 단면을 잡아낸 1층 전시작은 석고상과 회화로 표현한 작업이 유일하다. 연표를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런 작업이 주변에 걸려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팔짱을 낀 외관을 담은 가로 85cm, 세로 59cm의 회화, 같은 모습을 한 가로 75cm, 세로 27cm의 석고상 등에선 밝지 않은 노동자들의 인상이 드러난다. 선 채로 아예 뒤를 돌아 고개를 숙인 노동자, 팔짱을 끼고 한쪽으로 돌아선 상태에서 고개를 땅 밑으로 떨군 노동자의 모습도 그려졌다.

지상 1층에서 지하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면 U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걸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산업화 시대의 상징물인 컨베이어벨트(Conveyor Belt·물건을 연속적으로 운반하는 띠 모양의 장치)를 본떠 만든 결과물이다. 그 위쪽엔 창원노동문학자료관에서 찾아낸 노동 문학 관련 서적 28권이 걸상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올려졌다. '노동투쟁에서 노동문화 운동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전시실 주제는 '노동'. 이 공간에선 웅남동 완암지구 강제철거 현장, 마산역 철도노조 파업집회, 창원시청 앞 문화예술인 집회 등 1990년대 촬영된 사진이 걸렸다. 또 크레인, 엔진이 그려진 그림과 함께 마산자유무역지역을 배경으로 다국적기업 횡포를 비판하는 노동자들이 화염병을 들고 시위하는 수채화 작품 등도 채워졌다.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모습이 시선을 끄는 그림이다. 1980년대 민중가요 관련 악보와 노래 모음집, 낡은 카세트 테이프 등도 벽면과 선반 곳곳에 나왔는데, 이 중에선 고 이사장이 직접 작곡한 민중가요 '고백' 악보도 벽면에 붙어 있다.

▲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 기획전 '시대×노동×삶'전 출품작들.  /최석환 기자
▲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 기획전 '시대×노동×삶'전 출품작들. /최석환 기자
▲ 전시장 안 계단에 연도별 최저임금이 적혀 있다.   /최석환 기자
▲ 전시장 안 계단에 연도별 최저임금이 적혀 있다. /최석환 기자

지상 2층 전시실에 차려진 전시 주제는 '삶'이다. 지하에서 지상 2층 전시실로 이어지는 갤러리 계단 단면에는 연도별 최저임금 금액이 까만 글씨로 적혀있다. 변화하는 시대상을 나타낸 작업이다. 지하 1층 계단 맨 아래쪽에 적힌 1989년도 최저임금은 600원. 2021년이 된 지금은 8720원으로 15배가량 올랐다는 점이 나타난다. 2층에선 주로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담긴 전시작이 나왔다. 전시 기획자들이 창원에 사는 노동자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지 직접 물어보고 들은 내용을 담아 책자로 제작해 내놓았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30년 넘는 경력의 자영업자, 옛 수출자유지역 근무 경험이 있는 노동자, 금융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등이다. 이들은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전시 기획자들의 질문에 "생활의 일부", "앞으로 계속하는 것", "나의 주변"이라고 답했는데, 책에 담긴 인터뷰 내용은 별도로 인쇄돼 벽에 나붙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손편지도 인터뷰 책자 주변에 드러난다. 지역에서 노동자로 사는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눈길을 붙잡는다.

전시장을 찾은 김명숙(68) 씨는 "노동자들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살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전시였다"며 "노동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전시장에 걸려있는 옛 사진과 기계 그림을 보니까 새삼 새롭게 느껴져서 좋았다"고 평가했다. 김용환(59) 씨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소소한 행복,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기술해 놓은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며 "소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그런 전시는 아니지만, 우리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전시여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 기획을 총괄한 우무석 총감독은 "산업의 그늘진 면을 제외하고 밝은 면만 보여주는 전시를 이번에 만들게 됐다"며 "전시가 허술한 점은 많겠지만, 시대가 만들어낸 문화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전시는 사전예약제로 하루 8회(회당 최대 15명)만 진행된다. 31일까지. 월요일 휴관. 창원시문화도시지원센터(070-4699-4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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