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끝 모롱이 한겨울 초옥과 솔, 잣나무 네 그루가 있다. 하얀 백지에 먹으로 터치한 이 그림, 사실화이거나 상상화일 수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얘기를 그려서 사실화가 아니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겸재가 답사로 이룩한 진경산수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어느 쪽일까. 그림은 추사가 이를 그렸던 그의 오랜 유배지, 제주 대정읍 성안의 탱자나무 속 초가일 법도 하다. 한편으로 그의 해서(정자로 쓴 글씨)로 남긴 '세한도 발문(책이나 그림 끝에 붙인 글. 일종의 후기)'이 가리키는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관념적 스케치일 수 있다. 어쨌거나 그림 속은 눈 내린 듯, 원근감을 잃은 무색무취의 작은 집과 상록수뿐이다. 이 문인화가 국보로 격상할 수 있었던 것은 추사의 명필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다.

발문 요지 : '우선(藕船·제자 이상적의 아호)은 감상하라. 자네가 지난해 보내온 두 책자와 올해 또 희귀본을 구해 귀양살이하는 내게 보내 준 것은 권세와 이익에 빌붙는 세태와는 먼일이다. 공자가 '계절이 엄동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고 한 것처럼, 그대는 곤경에 처한 나를 변치 않고 지원해주니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 성인의 칭찬은 송백의 절조만 본 것이 아니라 역시 엄동을 겪은 인간의 역경을 보고 느낀 바 있어서이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정성에 감동하여 이 한 편을 그려 제자에게 헌정했다. 엄동설한 송백의 절조를 닮은 한 사람 때문에 세한도가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해 을사오적의 맏이인 이완용의 경우를 보자. 평시라면 아마 삼정승이라도 될 만한 인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국난을 만나고는 매국도 마다 않은 역적의 무리가 됐다. 난세에야 소인배와 충신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다만 발문은 지조를 논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박절한 세태를 비판한 것으로, 추사가 권좌에서 실각한 울분을 달랜 흔적이 배어있다.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따를 바는 아니다. 추사는 경학(經學), 금석학, 사학, 지리학 등에 두루 통한 백과전서파 학자다. 당시 청나라의 문사들이 그를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짧은 생각을 덧붙이자면 그의 유고인 <완당집>을 일별하면 수승한 재주로 천변만화를 담아냈으나 도학(道學)엔 멀고 배움의 요체를 찾기가 어렵다. 글씨만큼 철학으로 대성했을지 모를 천재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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