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암 경남대 명예교수 출간
퇴임 후 써온 수필 79편 묶어

이분이 또 수필집을 냈구나, 했다가 이번 책은 어딘가 다르구나 싶다.

수필가인 한판암(사진) 경남대 공과대 컴퓨터공학부 명예교수. 교수로 있을 때인 2005년 <찬밥과 더운밥>으로 시작해 2011년 정년퇴임 후에도 꾸준히 글을 써 지금까지 낸 수필집만 15권 이상이다.

▲ 〈황혼의 뜨락 풍경〉한판암 지음

그가 올해 초 수필집 <황혼의 뜨락 풍경>을 냈다. 이번 책에는 정년퇴직 이후 주로 2013년에서 2019년까지 쓴 수필을 시간순으로 정리했는데, 모두 79편이나 된다. 뭔가 삶을 되돌아 정리하는 느낌인데, 일종의 자화상 같은 책이다.

정년퇴직 이후 그가 처음 맞닥뜨린 건 막막함이다. 평생 일터에서 근면하고 성실한 이들이 갑자기 일을 멈추면 생기는 일종의 공황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생의 모두를 걸었던 일터에서 내려와 직면한 이모작의 세상은 생각보다 냉혹하고 막막하며 무관심한 채 거들떠보지 않아 섧고 안타깝더이다. 그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노년을 이름 모를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28쪽, 2013년)

"한 치 앞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생이다. 그래도 노년의 품격을 잃지 않고 고상한 삶을 누리다가 곱고 단아한 자태로 이승을 하직했으면 하는 바람은 부질없는 욕심일까."(52쪽, 2014년)

그래서 저자는 혹독하게 등산에 열중하는지도 모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느껴지는 몸의 고통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매일 세 시간 안팎의 등산을 되풀이한다. 신록으로 치장한 숲의 터널 같은 깔딱 고개와 비탈길과 능선을 따라 정상을 거쳐 오가는 산길은 힘듦을 잊게 하는 몽환의 노정이다."(61쪽, 2014년)

그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혼자되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뜻으로 그의 등산에도 나름의 규칙이 생겼다.

"등산길에 꼭 지키려는 철칙이 있다. 먼저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나 홀로 등산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면 호흡 조절이나 산행 속도 같은 잡다한 면에서 제약이 따른다. (중략) 아울러 등산길엔 지갑을 지참하지 않는다. 자칫하다가 하산 길에 누군가와 배가 맞아 소주라도 한 잔 나눈다면 하루 헛농사를 지은 격이기에 오그랑장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결기 때문이다."(127쪽, 2016년)

그렇게 오롯이 혼자서 지난날을 돌아본다. 자신이 보기엔 너무나 무난해서 조금은 민망한 삶이다.

"이제까지 외골수가 되어 잔뜩 독기를 품고 치열한 도전을 꾀했거나 심각한 문제에 모두걸기를 했던 적이 없다. 그런 연유로 밋밋한 삶의 언저리에 맴돌았다. 그래서 되새겨 볼 변변한 흔적이나 깊이 침잠된 세월의 앙금 한 조각 없는 게 더덜이 없는 민낯이다."(345쪽, 2018년)

저자의 말처럼 엄청난 모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큰 굴곡 없이 꾸준한 삶을 살아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그가 노년에 열중하는 등산과 글쓰기는 꾸준한 그의 삶과 어딘가 닮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일 가까운 산을 찾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아울러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지금까지처럼 매일 글을 가까이하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나를 가꿔 나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307쪽, 2017년)

해드림출판사. 389쪽,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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