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군주제 남아 있는 여러 국가들
평등사회 만들려는 노력·희생 진행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개최한 2020 서울민주주의워크숍에 다녀왔다. '아시아 민주주의 위기대응을 위한 시민사회연대'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워크숍에는 코로나19 사태 탓에 외국에서 참가자들이 초청되지는 않았다. 대신 아시아 사정에 대해 잘 아는 기자와 학자, 시민사회 활동가 등의 전문가들, 그리고 한국의 대학원에서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아시아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모여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이번 워크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주제 중 하나는 정치에서 왕이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내가 지금 디즈니 채널을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제도로서의 군주제가 아직 남아 있는, 또는 극히 최근까지 있었던 아시아 국가의 정치적 상황에는 빠짐없이 왕 또는 왕의 그림자가 등장했다.

네팔에서는 내전의 종식과 더불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왕정이 폐지되고 마오주의 공산당이 이끄는 정부가 들어섰다. 진보적인 네팔인들은 왕정을 자유와 정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 네팔은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새 출발을 이루어냈지만, 엘리트와 소외계층의 간극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일본의 '풀뿌리 우익운동'과 내셔널리즘에 대한 발표에서는 우익 사상이 텐노(천황)를 중심에 두고 펼쳐진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민족주의와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의 텐노는 현행 헌법에 따라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익들은 텐노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기를 원하며 '황국일본'의 부활을 지향한다.

요르단은 입헌군주국이라지만 왕의 정치적 비중이 큰 편이다. 왕은 각종 정상회담에 참석하며 외교적으로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부 인사의 임명·해임과 정책 수립 등 통치에도 상당 부분 관여한다. 왕을 비판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형법상 범죄로 여겨지며, 이는 아랍의 봄 당시 반정부 시위대를 탄압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민주화 시위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 태국에서는 청년들이 왕실의 제도적 역할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태국 왕실은 석유에서 얻은 부가 엄청난 것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브루나이의 왕실을 제치고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실로 선정된 적이 있다. 정치개혁과 함께 왕실 자산 사용을 왕실자산국 감독 하에 놓을 것을 주장하고 있는 시위대의 지도부는 왕실모독 혐의로 소환장을 발부받았다.

말레이시아는 지역별로 모두 9명의 술탄(왕)이 있고 국가수반은 이 9명 중 한 명이 5년씩 돌아가면서 맡는다. 1960년대의 건국 이래 2018년까지 계속 통일말레이국민기구를 중심으로 한 연립정부가 통치해 왔던 말레이시아에서 왕에게 정치적 실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올해 2월 마하티르 총리의 전격 사임 이후 빚어진 권력의 공백기에 왕이 마하티르 총리를 재신임하지 않고 무히딘 총리를 지명하면서 왕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재량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시아인들이 전통적 권위에 복종하는 성향이 있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왕과 관리들이 서로 견제해 온 전통도 있고, 농민들이 권위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전통도 있었다.

근대인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여러 아시아인들은 법 앞에 모든 시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희생을 치러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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