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동학농민군 오른 고성산에
우뚝 선 위령탑 굳센 의지 표상
문신 정몽주 봉안한 옥산서원
그윽한 풍경 차분해지는 마음

사천시 곤명면을 한참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하동군 옥종면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고성산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고려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1894년 진주 동학농민군 5000명이 일본군에 맞서 격전을 벌인 곳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이때까지 옥종면은 진주에 속했기에 진주 동학농민군이 이곳까지 온 것이죠. 고성산은 높이가 185.5m로 아담합니다. 그렇지만, 곳곳에 암벽이 많아 요새로 쓰기에 좋았습니다.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서 동학농민군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패배하죠.

◇정겨운 소나무 숲길을 따라 = 옥종면 북방리 불무마을 입구를 지나니 곧 고성산 입구입니다. 산성은 도롯가에서 800m 정도 산길을 올라야 합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오르막입니다. 정상 직전 너른 터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서 있습니다. 단순하고도 우뚝한 모양새로 동학농민군의 결의를 표현한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200년도 더 지난 지금은 좀 더 편안한 모양으로 만들어 농민군의 영령이 좀 쉬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위령탑 한쪽 나무 아래 따듯하게 놓인 벤치에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그곳에 편안한 얼굴로 앉아 햇살을 즐기는 동학농민군 어른들을 상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위령탑 뒤 솔숲 사이로 정상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바닥에 떨어진 솔잎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푹신해 기분이 좋습니다. 100m 정도 오르면 정상입니다. 정상 부근에는 동학농민군이 쌓았을 것 같은 산성 일부가 오랜 의지처럼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내려오는 길, 나지막이 가라앉은 마음으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롯이 발아래 밟히는 솔잎에만 집중해 걸으며 이 길을 걸어 올라왔을 동학농민군, 그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해봅니다.

아마 최근에 이곳에서 위령식이 열린 모양이죠. 하동군수를 포함해 기관단체 이름이 적힌 근조 화환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개중에 바닥에 떨어진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들어 제단 위에 올려두고 돌아섭니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사뭇 경쾌해집니다. 고성산에서 내려오니 긴 여행을 한 기분이네요.

▲ 동학혁명군위령탑. /이서후 기자
▲ 동학혁명군위령탑. /이서후 기자

◇신념과 바꾼 목숨 = 고성산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옥산서원이 있습니다. 아까 지나온 불무마을을 관통해 차선도 없는 시골길을 달립니다. 고성산성 바로 아래 불무마을이라 혹시 산성과 관련이 있나 싶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네요. 하동문화원에서 2015년 낸 <하동문화 즐겨 읽기>(곽재용 지음)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252년 이 마을 세도가였던 소희철이란 사람이 외침에 대비해 지방민을 동원해 고성산 정상에 성을 쌓았다. 마을 모퉁이에 풀무가 있는 대장간을 차려놓고 창과 칼 등을 생산했다. (중략)(불무가) 한자어화하는 과정에서 한자에는 '풀' 자가 없으므로 (대신 불자를 써서) 불무(佛舞)가 된 것이다."

고성산도 그렇지만 이 주변 산등성이들은 아담한 게 매력입니다. 풍경이 유유히 흘러간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 삼장마을회관 앞에서 잠깐 멈춰 섭니다. 표지석에 마을 내력이 단정하게 적혀 있네요.

"이 마을의 옛 지명은 위연(蝟淵)이었다. 마을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고, 연못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조선 중엽에 삼장원동(三壯元洞)이 되었는데,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지족당 조지서 선생이 세 번 장원을 해서 부르게 된 것이다. 선생은 연산군의 스승으로 갑자사화 때 생을 마치기까지 이곳에 사셨다."

지족당 조지서(1454~1504)는 하동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신입니다. 사실 세 번의 장원급제보다 대단한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강직한 성품이죠. 조지서는 연산군의 스승입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성종의 꾸짖음이 무서워 공부하는 척은 했지요. 그런 연산군에게 조지서는 엄하게 타이르고, 강하게 공부를 권했습니다. 연산군이 조지서를 특히나 싫어한 건 당연했지요.

사람들은 '아이고, 저러다 세자가 임금이 되고 나면 어찌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걱정했습니다. 조지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그저 자신의 직책에 온 힘을 기울일 뿐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고는 실제 연산군이 즉위합니다. 낙향해 조용하게 지내던 조지서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상소를 보냅니다. 요즘 말로 옮기자면 이런 대목이 있었답니다. '그때 제가 싫다고 해도 공부를 더 시켰으면 전하가 이런 잘못을 안 했을 건데요.' 연산군은 크게 화가 나 조지서를 참수하고 일족을 멸합니다.

그의 참혹한 마지막을 생각하니 삼장마을 표지석 앞에서 괜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 하동 옥종면 옥산서원 뒤편으로 소나무숲이 보인다. 전국에서 정몽주를 봉안한 서원이 16곳인데, 경남에서는 옥산서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서후 기자
▲ 하동 옥종면 옥산서원 뒤편으로 소나무숲이 보인다. 전국에서 정몽주를 봉안한 서원이 16곳인데, 경남에서는 옥산서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서후 기자

◇푸르고 푸르다 = 옥산서원은 고려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신 정몽주(1337~1392)를 모신 곳입니다. 새로 조선을 건국하려는 태조 이방원에 맞서 차라리 왕을 바꾸더라도 고려왕조는 유지하자는 신념을 지키다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전국에서 정몽주를 봉안한 서원이 16곳인데, 경남에는 이곳이 유일하다네요. 서원은 원래 정몽주를 포함해 영일 정씨(迎日 鄭氏) 선조 6명의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世德祠)란 사당이었습니다. 이후 옥산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정몽주의 위패만 모시게 됐답니다.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65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다시 지었습니다. 옥산서원은 뒤편으로 소나무숲을 옷깃처럼 두른 평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원 담장 주변 밭에는 배추와 시금치가 야무지게 자라고 있습니다. 덕분에 초겨울 옥산서원 정취가 푸르고 푸릅니다.

푸르고 푸른 것은 동학농민군, 조지서, 정몽주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킨 그 신념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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